온유하고 겸손하니(4) – 죄짓는 당신을 위한 백전백승의 변호인

Dane 목사님의 책, Gentle and Lowly의 각 챕터를 리뷰하는 네 번째 글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 사역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히브리서 7장25절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온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으신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한 간구를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압도하며, 우리의 죄보다 훨씬 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서 예수님의 중보 기도를 통해 계속 부어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간구를 통해 십자가 보혈로 구속한 죄인들을 향한 마음이 끝없이 부어집니다. 그리고 그 간구는 단 한순간도 멈춰지지 않고 하늘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통해 당신을 향한 그리스도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이번 시간에 리뷰할 장에서는 예수님의 중보사역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또 다른 사역을 통해서 구원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여정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 장의 제목은 바로 ‘대언자’(Chapter 9 – An Advocate)입니다. 

1. 하늘의 법정 – 곧 의로우신 변호인, 예수 그리스도

이제는 고전이 된 영화 톰 크루즈의 ‘어 퓨 굿 맨’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함으로 죄를 짓게 되어 군인 법정에 서게 된 쿠바 미군 해군기지의 두 병사를 위해서 그들의 변호를 맡은 캐피 중위(톰 크루즈)는 마지막 한 수를 던집니다. 바로 기지의 총사령관이었던 제셉 대령(잭 니콜슨)을 법정에 세우는 강수를 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심문이 효과적으로 끝나지 못한다면 상관을 모욕한 죄로 자신이 도리어 위험에 처할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캐피 중위는 이 심문에서 제셉 대령을 마지막까지 몰아붙입니다. 캐피 중위의 번뜩이는 심문으로 인해 코너에 몰린 제셉 대령은 “넌 진실을 감당 못해!”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자신의 잘못된 명령을 자백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살인죄를 뒤집어썼던 두 병사는 무죄를 받으며 통쾌하게 영화는 마무리가 됩니다.

이들의 무죄를 위해 헌신을 다해 싸워준 영화 속 톰 크루즈의 모습은 너무도 멋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도 억울하게 누명을 쓴 피고를 변호하기 위해 법정에서 고군분투하는 변호인들이 있고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아냈을 때 그 짜릿함에 사람들은 환호를 보냅니다. 변호를 맡았던 그 변호인은 언론에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습니다. 하지만 이 땅의 법정과는 달리 하늘의 법정에는 단 한명의 변호인만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호인은 단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백전백승의 변호인입니다. 그곳으로 가보겠습니다.

이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의한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주재하시는 법정입니다. 재판관석에 전지전능하신 절대자가 앉아계십니다. 그리고 피고석에는 피고인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성도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입니다. 또한 반대편에는 우리들을 밤낮 참소하는 고발자가 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계12:10). 마지막으로 피고인석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와 함께 나란히 앉아 계신 그 백전백승의 변호인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자는 이번 장을 통해서 중보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된 그리스도의 대언 사역을 독자들에게 묵상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는 중보와 대언 사역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지만 단어 자체에서 구별할 수 있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죄인 가운데에 계셔서 그 관계를 화목하게 하신다. 대언 사역도 이와 유사하지만 특별히 대언 사역은 중보 사역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가운데에 계신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넘어오신 것이다. 즉, 중보자는 둘 사이 가운데에 서지만 대언자는 단지 둘 사이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한쪽(성도들)으로 넘어와 그들을 대변해서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87쪽). 

저자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대언자 또한 되십니다. 이 진리를 분명하게 계시하는 구절은 우리가 다 아는 요한일서 2장1절 말씀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2:1)

2. 하늘의 대언자 –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사도 요한은 이 서신서를 통해서 자신의 ‘자녀들’ 곧 자신이 목양했던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이 편지의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자신이 펜을 들은 이유는 곧 그들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2:1). 이 요한의 뜻은 요한일서 전체를 통해서 한치의 애매모호함 없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는 어둠에 행하지 않는다(1:5).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다(2:9).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2:15).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3:9). 범죄 하지 않는다(3:6). 이렇게 서신서 전체를 통한 요한의 명확한 잣대는 성도들이 숨을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이 서신을 읽은 성도들은 자칫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며 비통함에 빠질 수 있습니다. 표면상으로만 말씀을 읽다 보면 사도 요한이 요구하는 것은 죄가 없는 완전함인가라는 오해해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서신서 가운데 단 한 구절 바로 이 2장1절에서 믿는 자들에게 더할 수 없는 위로와 확신을 줍니다. 이 구절에서 요한은 마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계속해서 죄를 짓지 말아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아라. 또 그것이 이 편지를 쓴 목적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만일 너희가 죄를 짓게 되라도 염려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죄짓는 너희를 위한 대언자가 계시는데 그분은 공의로우신 너희의 구원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저자는 지난 여러 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요한일서 2장1절, ‘대언자’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 ‘파라클레토스’의 의미에 집중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총 5번 쓰이게 되는데 이곳 요한일서2:1절을 제외한 4번은 모두 요한복음에 예수님 ‘다락방 강론’에서 나타납니다(요14:16, 26; 15:26; 16:7). 그리고 네 번 모두 개역개정 성경에는 ‘보혜사’로 번역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위로를 주시며 성령 하나님께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실 때 이 단어 ‘파라클레토스’ 곧 ‘보혜사’가 쓰이게 됩니다.

하지만, 저자도 언급하듯이 이 헬라어 단어 ‘파라클레토스’는 영어든 한국어든 딱 한 단어로 그 원어의 의미가 가지는 뉘앙스를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은 단어입니다. 여러 영어 성경 버전도 그래서 각각 다른 단어(Helper, Counselor, Advocate, Comforter. Etc.)로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한국어 성경도 ‘보혜사’ 혹은 ‘위로자’(흠정역)등으로 번역되며 새 번역 성경에도 구절 아래에 주석이 달려서 ‘변호해 주시는 분’으로 다른 번역의 가능성을 명시합니다. 저자는 초대 교회 교구들(어거스틴 등)이 이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 ‘대언자(Advocate)’이라고 번역한 점을 예를 들면서 ‘대언자(Advocate)’가 이 원어의 의미와 가장 가깝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통해 요한일서 2장1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언 사역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죄인들에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해 재판관인 하나님께 나아가심. 우리의 약함을 온전히 이해하시고 동정하심. 우리를 대신해서 기꺼이 말씀하심. 바로 하늘의 대언자, 죄인들의 대언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언 사역입니다. 어떻게 이 변호인이 백전백승할 수 있습니까? 왜나하면 그분은 홀로 절대적으로 “곧 의로우신”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영혼과 몸을 죽이시는 재판관 앞에 이 의로우신 변호인 없이 나아가는 것은 절망적입니다. 가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변호인을 찾기도 전에 먼저 우리 편에 넘어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변하시는 분, 이 대언자의 존재는 우리를 평안과 위로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말씀은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을 것이다’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대언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변호인에게 지불할 어떤 수임비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누구에게나(요일2:1) 이 대언자는 계속해서 대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하늘의 중보자이시며 대언자 되심 – 구원자의 마음

저자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대언 사역의 미묘한 차이점을 말씀을 통해서 설명해 줍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히브리서7:25절과 오늘 살펴보는 요한일서2:1절에서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차이는 뭘까요? 히브리서 7장25절은 그리스도께서 ‘항상’ 성도들을 위해 살아서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반면에 요한일서 2장1절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우리에게는 대언자가 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차이가 보이십니까?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항상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언 사역은 필요가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그 시기는 바로 우리가 죄를 범할 때입니다. 성도가 죄를 짓는 상황이 오면 공의로우신 대언자가 우리를 위해서 대언하십니다.

그리고 저자는 지난 장에 이어서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대언 사역에 관한 깊은 묵상의 글을 남긴 ‘천로역정’으로 우리에게 유명한 청교도 신학자 존 번연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리스도, 대제사장, 계속해서 중보하심. 그리스도, 대언자, 허물의 때에 대언하심.

그리스도, 대제사장, 언제나 행동하심. 그리스도, 대언자, 때때로 행동하심. 

그리스도, 대제사장, 평안의 때에 행동하심. 그리스도, 대언자, 요동의 때, 혼란의 때, 애통의 때에 행동하심. 자신의 소유가 된 성도가 더럽고 추악한 죄에 빠져버렸을 그때에 대언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위해 대언하심” (존 번연, The Work of Jesus Christ as Advocate, 1:169)

저자는 이 그리스도의 대언 사역이 얼마나 개인적인가에 주목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는 그 순간 죄가 없고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 상태로 바뀐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기까지 우리는 죄와 멀어지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해져 가면 갈수록 거룩함에 비추어서 나의 죄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짓는 죄는 줄어들지라도 그 죄에 대해서 느끼는 애통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커지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때때로 실패합니다. 유혹에 넘어집니다.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신의 대언자께서 행동하십니다. 당신을 위해 공의로운 대언자께서 당신의 무죄를 증언합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대언자의 목소리는 더 크게 울려 퍼집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인간의 법정에서와 달리 당신은 이미 유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재판장도 알고 있는 사실이며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신을 변호하는 대언자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제는 죄인인 당신은 그 대언자의 한 점 흠 없는 공의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럽고 추악한 죄인인 우리는 법적으로 독생자의 의로 말미암아 완전히 무죄인 깨끗한 상태로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서있습니다. 

그럼에도 죄를 짓지만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과 같이 대언자의 대언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의 무죄함을 다시 한번 확증하십니다. 재판관인 성부 하나님 또한 독생자이신 대언자와 똑같은 뜻을 갖고 계십니다. 대언자의 대언을 주저함 없는 온전한 기쁨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사실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그 대언자를 선임한 분이 바로 재판관이신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맺음말

저자는 질문합니다.

“당신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당신만 알고 있는 삶의 어두운 부분을 예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느끼시나요? 술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것, 시시때때로 조절 못하는 분노, 사업에서 부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 사람들 앞에서는 세상 나이스 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그 동기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 당신을 향한 비판에 대한 가슴속 깊이 차오르는 분노들, 습관적인 포르노그래피. 이처럼 영적으로 어두운 순간들에서 여러분의 구원자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그 순간에 당신의 구원자, 당신의 위로자 파라클레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변호사는 일어나 당신을 위해 대언하십니다. 당신이 죄를 지은 바로 그때에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분이 누구신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죄를 짓는 그 순간에도 절대로 그들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91쪽).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필요하다면 내 몸을 처 복종함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죄와 멀어지십시오.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비겁하게 변명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변호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참 유일하신 대언자에게 그 죄를 가지고 가십시오. 우리를 위해 찔림과 상함을 받으신 그 구원자께서 이미 당신을 위해 변호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불의가, 당신의 절망이, 절대적으로 공의하시며 우리 영혼의 유일한 참 만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다시금 달려가게 만드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니(3) – 천국에서 울려 퍼지는 당신을 향한 기도 소리 온유하고 겸손하니(5) – 하나님의 긍휼을 불타오르게하는 당신의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