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나로 그리스도를 닮게 한다.

주님의 신실한 일꾼인 제리 브릿지즈는 자신의 저서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라 (원제: The Discipline of Grace)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서 멀어져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성취를 토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또한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행위를 토대로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하지 않으셨다.” 그의 말은 정말 명철하고 예리하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우리 자신의 성과를 토대로 주님께 나아가려 하거나 그 행위에 합당한 복을 받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그러할 때가 참 많음을 고백한다. 죄로 완전히 타락했던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종종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나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며 살 때가 많다. 값없이 받은 선물인 은혜의 구원을 마치 값을 치르고 얻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은혜가 구원받을 때에만 필요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열심 없는 수동적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은혜가 자신을 값없이 구원으로 이끌었듯, 은혜가 자신을 저절로 성화시킬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은혜와 성화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평생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는 은혜가 성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가 주님의 은혜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듯이, 성화 또한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혜는 성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1. 은혜 안에 거하는 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브릿지즈는 은혜를 “진노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과분한 은총” 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를 통해 알 수 있는 건,주님의 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이라는 점이다. 이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그로 인한 죄악 됨은 온전히 거룩하신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즉, 저주받아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은 주께서 그러한 진노의 자녀에게 결코 받을 수 없는 과분한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의 사실이 은혜라는 신비 안에 들어있다.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모순된 가치가 말이다. 바울은 이 은혜의 신비를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전혀 사랑할 것이 없는 우리 죄인을 위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시기까지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말이다. 계산할 수 없는 이 은혜를 통해 우리가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 (롬5:21; 6:22-23). 곧,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믿음을통해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 말이다.

따라서,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산 우리들은 더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은혜 아래에 있는 자로서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알거니와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6:6).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롬6:14). 우리는 완전히죄 아래 팔려 죄가 시키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녔던 처지였다. 죄의 지배권 아래 어찌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주님의 넘치는 은혜는 우리를 그곳에서 탈출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권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것이다(롬 6:11). 우리는 죄의 왕국에서 탈출한 자로서 새로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게 되었다.

죄의 지배권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하는데, 브릿지즈의 말이 도움된다. 그는 이렇게 말을 하는데, “죄의 활동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요, 죄의 지배는 모든 불신자들에게만 해당된다” 고 이야기한다. 곧, 죄의 지배와 영향력은 엄연히 다르다는 뜻이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을 때 죄의 지배에서 온전히 벗어난 자이기 때문에 죄의 영향은 지속해서 받을 수는 있지만, 그 권세 아래에서 죄의 종처럼 살 수 없게 되었다.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게 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넘치는 은혜로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우리는 더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매일 묵상해야 한다. 사탄은 우리가 은혜를 잊고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변질시키려 부단히 노력한다. 마치 나의 성취로 얻은 구원인 것처럼 또는, 아직도 죄의 지배권 아래 있는 무기력한 자인 것처럼 속이려 든다. 하지만 주님의 이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은 우리를 어둠의 구렁텅이로부터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빛 되신 예수님의 통치권 아래로 인도하여 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한다.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산 자로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안에서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의 삶 가운데 죄가 더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진리를 기억하고, 은혜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가 죄가 죽은 그 자리를 대신 채우도록 주께 항상 간구해야 한다. 능동적으로 나를 단련하는 가운데서 말이다.

2. 은혜 안에 거하는 자는 능동적인 성화를 추구한다.

은혜와 성화는 뭔가 상충된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수많은 신학자가 이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두고 논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진정으로 구원받은 성도 가운데서도 은혜와 성화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신앙생활을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도 한때는 은혜를 잘못 이해하여 이 가치를 오직 거듭남의 구원에만 초점 맞추어 적용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능동적으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려 노력하기보다는 조금은 수동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마치 가만히 앉아 있어도 내주하신 성령께서 은혜로 다 해주실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분의 과분한 은총을 오해한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은혜는 성화를 어떻게 정의 내리는가?

“성화”라는 단어는 “거룩하게 됨”을 뜻한다. 곧, 성화는 죄를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형상으로 점점 자라나간다는 의미이다. 주의 은혜로 죄의 지배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화의 과정은 필수이며, 이 또한 은혜로 이루어진다. 죄에 대한 용서와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나게 해주시는 성령님께서 그의 넘치는 능력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이끄시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거듭남이 주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말미암았던 것처럼 성화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은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 성령님의 주권적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변화하여”라는 단어가 외형적인 변화가 아닌 인간 내면의 본질적 변화를 뜻하는 것을 보았을 때, 성화는 초자연적 현상이며, 성령님이 그 변화의 주인이시라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거룩해지는 그 시작이 우리의 열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또한 주님의 은혜이며, 그분의 넘치는 은총이 없으면 우리의 거룩해짐은 결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인도한다. 능동적 훈련을 사모하게 한다. 그 이유는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기꺼이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속해서 그능력이 효력을 발휘하여 거룩의 삶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의 은혜가 능동적 사랑에 기인한 것으로써,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인정을 받으려 열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통해 주께 인정받은 그 감격과 기쁨 안에서 열심을 내도록 한다.

스코틀랜드 청교도 헨리 스쿠걸은 이렇게 증언한다. “인간의 영혼 안에 깃든 신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이다.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도 없을 뿐더러, 그 효력을 발휘하게 하는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을 만한 자격 역시 우리에게는 없다. 그 거룩한 일이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우리를 덮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측에서 협력하는 아무 노력도 없이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는 또한, “우리는 분발해야 하며, 이미 받은 능력을 작동시켜야 한다.” 고 말한다. 그의 균형 잡힌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성화는 주께서 시작하시고 그 능력을 주셔야만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은혜 가운데 성령님을 통해 그 무한한 능력을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더욱 분발해야 하며, 그 능력을 작동시켜야 한다.

주님은 절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지 않으신다. 인격적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초자연적인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신다. 그래서 미쁘신 주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시키셨고, 은혜 안에서 성화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영적인 도구(말씀, 기도, 교제, 고난 등)를 허락하셨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성화의 현장에 불완전한 우리를 동참케 하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분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공급된 영적 도구들을 사용하길 원하시며, 우리가 내는 열심을 기뻐 받으신다.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 말씀 묵상과, 기도, 성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더욱 힘씀으로 말이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초자연적 현상에 우리는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는 없다. 하지만 미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 아름다운 거룩의 현장에 참여시켜 주신다. 주님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영적 신비를 맛보게 해주시기 위해 말이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부과된 짐이 아니다. 주께서 주신 선물이자 특권이다. 따라서 주의 은혜를 더욱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가 더욱 예수님의 형상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을 더 닮고자 노력할 것이다. 영적인 특권(말씀과 기도)을 더욱 사용하여 매일의 삶 가운데 죄에서 돌이켜 의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영적 현장에서, 은혜에 근거한 우리의 열심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롬12:1)라는 것을 매일 기억해야 한다.

결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님의 능력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우리는 넘치는 은총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십자가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죄의 노예에서 건짐을 받아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오직 주의 은혜로 말이다. 또한, 성령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힘입어 내면의 본질이 변화되는 거듭남의 신비를 체험했다. 그 단회적인 거듭남의 사건 이후로도 성령님은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어 예수님의 인격을 닮도록 이끄신다. 은혜 가운데서 말이다. 곧, 나의 나 됨은 오직 주의 은혜로 되었고, 지금도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은혜에 나타난 주님의 풍성한 사랑과 능력, 인격적 자비와 공급하심을 더욱 묵상함으로 주의 거룩을 열심히 쫓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내디딘 은혜의 열심을 정말 기뻐하실 것이다.

참조 문헌: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라 – 제리 브릿지즈,” “성화 – 마이클 리카르디,”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 헨리 스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