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 를 좋아하는 당신에게…

돌직구, 사이다 발언, 팩트(Fact) 폭행과 같은 말들은 누군가의 발언이나, 발상 가운데 있는 답답한 오류들을 제 삼자가속 시원하게 지적함을 통하여 말그대로 “촌철살인” 이 완벽하게 이루어졌을 때를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향, 즉 자신이 아는 경험과 지식에 빗대어 누군가의 언행에서 문제가 발견되었을 시, 그 대상의 오류를 수정해 주고자 하는 과정 속에서 비롯 되어지는 일 가운데 하나이다.

 허나, 아쉬운 점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상황이 꼭 긍정적 측면의 결과, 즉 오류를 범한 사람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만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종종 그 가운데는 개인의 교만이나, 또는 자기 어필과 같은 불순한 동기들이 오히려 앞장 서기도 한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본질을 외면한 논쟁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조차 심심치 않게  발견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해와 신학적 지식의 깊이가 무르 익을수록, 더욱 낮고, 겸손한 자세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사랑으로 대하고, 깨달은 바를 성숙한 자세로 나눠야 할 성도의 대화가 오히려 그와 상반되는 소위 “팩트 폭행” 만을 일삼고 마무리 되는 그 모습은 참으로 안쓰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어쩌면 누군가는 그리스도인의 역할 중 하나가 성경의 올바른 진리를 선포하는 일임으로 그 일이 만족되었다고 한다면, 다른 외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즉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였는가 와 같은 부수적인 일들에 굳이 고민할 필요가있는가 란 질문을 가져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올바른 말을 전하는 것이, 그 올바른 것을 온전히 알지도 못하고, 그것을 전할용기조차 내어보지 못한 누군가보다는 나은 것 아니냐 라는 논리를 펼쳐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전하는 진리가 올바르다면, 그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그 자체에만 신경을 쓰면 될 뿐, 그것을어떠한 모습과 방법, 과정으로 전달 하였는가 란 문제는 우리 관심의 영역이 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과 관련하여, 사도 바울이 전하는 다음의 말을 들어보자.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로새서 4:6

사도바울은 본 구절의 바로 전 구절인 5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을 향하여, 교회 밖의 외인 들과의 대화에 지혜롭게 참여하여 주어진 시간을 복음 전도의 최선의 기회로 삼을 을 명령한다. (5 절의 세월을 아끼라! 라는 표현의 영문은 다음과 같다 “Making the best use of the time). 

그리고 이어지는 6절 말씀은 그들의 입에서 전하는 말의 방식에 두가지 지침을 얹어주는데,  첫째는 그들이 말을 은혜롭게 할 것을(Be gracious), 그리고 둘째는 그 말에 소금으로 맛을 내는 수고를 더할 것을 명령한다 (Seasoned with salt). 

정리 하자면,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불신자들과의 대화 자리를 항상 복음 전도의 기회로 생각하여 최선을 다하여 사용하되, 그 대화의 방법으로서, 은혜스러움과 맛깔 나는 방식, 즉 위트와 지혜가 넘치는 자세를 유지할 것을 명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이러한 지침은 오직 복음전도, 즉 불신자의 심각한 구원의 문제만을 위한 특수한 방침이자 권고일까? 아니면, 교회 내의 성도간의 대화에서 역시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일까? 오늘날 누군가의 생각처럼, 자신의 관점이 성경적으로 옳음을 확신한다면,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 정도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여겨도 되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과 관련하여, 빌레몬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모습은 좋은 예가 될 것 이다. 잘 알다시피, 빌레몬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만난 노예 오네시모를 위해 그의 주인이자, 골로새 교회의 리더였던 빌레몬에게 용서를 요청하는 편지이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서부터 자유를 위해 로마로 도주하였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은 자였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한 인물로 성장한 자였다.  

비록, 오네시모가 바울에게 큰 유익이었지만, 그러나 바울은 자신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또다른 믿음의 형제,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행한 잘못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오네시모가 정식으로 빌레몬에게 용서를 받고 자신과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였다. 이를 위해 기록된 편지가 바로 빌레몬 서신인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은 오늘날 바른 성경적 지식과 가르침을 전달하는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좋은 모델이 되어준다.   

 비록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빌레몬서 8-10)

바울은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죄사함을 받은 성도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8절에서 자신이 빌레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권위를 가지고, 담대하고, 강경하게, 마땅한 일로서, “용서” 를 명령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모든 마땅함을 뒤로하고, 오히려 사랑으로서, 자신이 그에게 간구할 것을 택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뒤에 등장하는 여러 글의 묘사는 빌레몬을 향한 바울의 진실된 간구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그 예를 잠시 살펴보자.    

1. 바울은 노쇠한 자신이 처한 힘든 수감 생활을 강조하며, 그 어려움 가운데 귀한 자식과 같이 출산한 자가 오네시모 임을 강조하며, 그 영혼의 소중함” 을 강조 한다. 10

2. 바울은 새롭게 얻은 그 영혼이 심지어 자신의 사역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오네시모가 가진 역할의 소중함” 을 또한 다양하게표현한다. 11-13

3.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 빌레몬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일을 행하지 않을 것임을 전하며,빌레몬을 향한 사랑 표현” 을 잊지 않는다. 14  

 4.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통해 갖게 된 금전적 손해조차도 자신이 이름을 걸어 대신 지불할 만큼 노력할 것을 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빌레몬에게 과거의 자신이 행한 어떠한 수고의 댓가도 바라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한다.  18-19

5.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의 기대보다 더욱 행할 것을 확신한다는 말과 함께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21

그런데, 사실, 바울의 이 다양한 표현들 가운데 필자의 눈에 띈 가장 흥미로운 표현은 헬라어 ”스프라크논” 이라는 단어이다. 이말은 사람의 내장”, 혹은 “마음” 을 뜻하는 단어인데, 바울이 편지의 머리말 7절에 빌레몬의 장점을 꼽으며, 그가 골로새 교회성도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칭찬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이 단어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 당시 사람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말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한 헬라어 단어가 “카르디아” 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일반적인 표현을 제쳐두고, 그를 대신하여 ”스프라크논” 이라는 잘 쓰이지 않는 원색적 표현을 굳이 선택한  것이다. 참고로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총 11번 밖에 등장하지만( 카르디아는 157번 등장), 흥미롭게도 그 가운데 가장 짧은 책인 빌레몬서에서만 3번에 걸쳐 가장 많이 사용되었음을 보게 된다. 이쯤 되면, 바울이 이 단어를 어디에 사용 하였는가는 또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기 충분하다.

그는 먼저도 언급하였듯이, 편지의 시작에 빌레몬의 장점, 성도의 마음” 을 평안케 한다 라는 표현에 가장 먼저 이 단어를 사용하고, 편지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20절에서 성도들의 마음 평안케 하는 그 장점으로 바울 자신의 마음”을 또한 평안케 해 달라는 당부를 할 때 다시 한번 사용됨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또 다른 마지막 한번은 과연 어디에 사용이 되었을까? 흥미롭게도, 그 마지막 한번의 사용은 편지의 정확히 중간 지점인 12절에서 오네시모는 나의 심장”, “심복” 이다! 라고 말하며, 그의 소중함을 바울이 간절히 전할 때 사용되어진 것을 보게 된다.  

즉, 바울은 이 한 독특한 단어를 통해 빌레몬의 장점과 편지 속 바울, 자신의 간절한 바램을 연결하였고, 그 일의 중심에오네시모 라는 인물이 있음을 명확히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간단한 예에 불과하지만, 이 짧은 편지 한 편에서 우리는 빌레몬의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영적 거장” 바울의 사랑의 수고를 여실히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깨달아알아가고, 그 말씀 안에서 성숙해 가는 만큼, 그 성숙의 열매가 아름답고, 풍성한 모습으로 나타나도록 수고가 반드시 함께 해야함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기억하자. 교회 안에서 영적 교만의 모습은 단순히 팩트 폭행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때로는 더 나아가, “저럴 바엔 성경을 모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라는 비극적인 결말까지도 치닫게 할 수 있음을 말이다.

 “참고로, 이 글은 TMS에서 이제 갓 학업을 마친 햇병아리, 내 자신을 향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