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행하는 자는 왜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누가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가?” 다른 말로 “누가 지옥에 들어가는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은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 말씀처럼 “바깥 어두운 데”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 24:51).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러므로 그 아버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그 나라 밖에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좋은 은사와 선물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바깥 지옥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지금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도 모두 사라질 것이니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불의한 자”의 명단을 공개했다.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자 그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음행하는 자”이다. 두 가지 질문에 답하는 방법으로 음행하는 자가 왜 천국에 못 들어가는지 살펴보자. 먼저 살펴볼 질문은 “음행”이 왜 죄인지에 관한 것이고, 그다음에 살펴볼 질문은 “음행”이 왜 천국에 못 들어갈 정도로 심각한 죄인지에 관한 것이다.

첫째 질문: 음행은 왜 죄인가?

본문에 “음행”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포르노이(πόρνοι)로 여기에서 포르노그래피라는 말이 나왔다. 신약 성경엔 총 10번 사용되었는데, 모두 “음행하는 자(들)”(고전 5:9, 10, 11; 6:9; 엡 5:5; 딤전 1:10; 히 12:16; 13:4; 계 21:8; 22:15)로 번역했고(고전 5:11만 “음행하거나”로 번역),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거나(고전 5:9, 10), 형제라 말하지만, 그 고백에 합당하지 않게 사는 거짓 그리스도인을 가리키거나(고전 5:11; 6:9; 엡 5:5; 히 12:16),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이들로 말씀의 정죄를 받는 이들을 가리킨다(딤전 1:10; 히 13:4). 특별히 계시록 21장 8절과 22장 15절 말씀에서 “음행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지옥에 던져질 것이며 하나님의 성(천국) 밖에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포르노이의 원형인 포르노스(πόρνος)는 “간음하는”, “음행하는 자”라는 뜻을 갖는데, 가장 일반적인 개념에서 “성적으로 부도덕한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음행, “성적으로 부도덕한” 것이 왜 죄인가?

최근에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은 n번방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의 피의자들이 한 일이 성적으로 부도덕한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피해자의 동의 없이 협박과 강요에 의해 성적인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부도덕한 일이다. 강간이나 성폭력, 성추행 등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적인 모든 성범죄가 “음행”에 포함된다. 도덕 기준을 벗어난 성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면 상호 합의에 의한 성적 행위는 음행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결혼이라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결혼 밖에서 다른 사람과 합의로 성관계를 맺으면, 아무리 합의를 했다 해도 결혼 관계 안에 있는 배우자에게 큰 충격과 고통을 준다. 결혼 관계 밖에서 일어나는 성관계를 “간음” 혹은 “간통”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대한민국 형법으로 간통죄를 폐지했다고 하나 민법상 그리고 도덕 기준으로서 간통 혹은 간음은 큰 죄다.

만일 부부가 어떤 이유로든 결혼 관계 밖에서 자유롭게 성적 만족을 찾아도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문제가 없지 않은가? 혹은 아직 결혼 전이면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성적 관계를 해도 누구도 상처받지 않으니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당신은 강요에 의한 성행위와 부부 관계를 무너뜨리는 간음이 죄라는 사실에 온전히 동의하면서 마지막, 이 질문에는 고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사실 오늘날 세상이 권장하는 성문화가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이 꼭 결혼까지 이어지지 않아도, 후회 없이 사랑한다면 서로 자기의 것을 다 주어도 괜찮다. 세상은 꼭 이런 진정한 사랑이란 핑계를 이용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성을 자유롭게 즐기도록 부추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자기 성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즐기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여기서 우리는 논의에서 완전히 제외된 대상을 떠올려야 한다. 바로 하나님이다. 개인의 성행위가 부부관계 밖에서 일어날 때 죄, 부도덕한 행위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문제가 없는지 충분히 고려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성은 철저히 하나님을 무시한다. 혹 간음으로 배우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자를 욕하더라도 어떤 성행위가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지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다.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창 1:27-8; 2:24). 다른 말로 성을 창조하고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께서 성에 관련된 도덕 기준 그 자체가 되신다는 걸 생각하면 그분을 고려하지 않고 음행이 왜 죄인지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든 무시하고 성적 부도덕함을 내가 정하고 그에 따라 사는 사람이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행”, 성적 부도덕함은 무엇일까?

둘째 질문: 음행은 왜 천국에 못 들어갈 정도로 큰 죄인가?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도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셨는데, 율법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성적인 행위 곧 “간음”을 “하지 말라”고 분명히 금하셨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 특별히 율법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교사들도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기준을 각각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 마음대로 해석했는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진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설명하셨다.

“간음하지 말라”를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신 성도덕 기준은 강요에 의한 성행위, 부부관계 밖에서 일어나는 성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행위만으로도 이미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나는 행위다. “이미 간음”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n번방이 왜 운영되는가? 비슷한 플랫폼이 왜 계속 생기는가? 왜 범죄자들이 성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가? 많은 돈을 내면서까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려는 사람이 정말로 많기 때문이다. 포르노그래피 산업에 마약과 범죄가 연루되어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 쉽게 찾아보는 이들은 범죄자를 욕할지언정 그 산업을 키우는 데 기여하고 있는 자신이 문제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호기심이 왕성할 뿐, 자연스러운 현상일뿐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기준 따위는 철저하게 무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신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지옥에 던져지는 것. 곧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을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음행한 자는 지옥에 던져진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면 지옥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죄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 때 세우신 원칙대로 부부관계 안에서만 성을 즐길 수 있다. 강압적으로 성적 만족을 얻으려는 행위는 큰 노력을 들이지 않더라도 멀리할 수 있다. 혼전순결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청년들도 있다. 부부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성을 소중히 지키려고 하는 노력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음욕을 품지 않는 것은 어떨까? 아주 오래전 기독교 수도사들은 스스로 거세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신 “음욕” 자체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성기를 제거하는 것으로 음욕이 제거되지는 않는다. 음욕은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한다(막 7:19, “음란”).

예수님 말씀대로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음란이 시작되는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 눈을 빼어 버리고 손을 찍어 내버리는 것은 잔인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속사람을 제거하는 건 불가능하다.

음란한 마음을 교체하는 방법은 없을까?

많은 사람이 자기 도덕 기준을 가지고 성을 즐기고 있지만, 솔로몬처럼 나이가 지긋이 들어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그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옳지 않은 방법으로 음욕을 충족했던 일과 음란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피할 수 없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선하고 아름다운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대하기 원하는 순전한 마음과 평생 싸우는 음란한 마음 때문에 탄식이 나올 정도로 수고스럽고 힘이 든다. 물론 음란한 마음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도덕 기준에 눈감고 마음대로 욕구에 따라 살면 편하다. 언젠가 살아서 혹은 하나님 나라와 지옥을 앞에 두고 진실과 마주해야 하지만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렇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도록 창조하셨다(창 2:25). 죄가 모든 것을 망쳤다. 사람은 죄를 짓자마자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몸을 가렸다(창 3:7). “불의한 자” 곧 죄인은 하나님 기준으로 볼 때 모두 “음행하는 자”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영원히 고통스러운 지옥에 들어간다.

하나님의 율법을 진지하게 연구하던 성경 학자, 그래서 하나님 말씀 기준에 따르면 자신은 절대로 영생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누리지 못할 것을 알았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법을 알려주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음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죽고 거룩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참으로 사랑하셔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 이유는 바로 누구든지 그 어떤 불의한 자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다른 말로 지옥에 가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히 화목한 관계로 살아가는 인생,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인생이 된다(요 3:16). 예수님은 음행하는 자의 음란한 마음을 제거하고 새 마음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어떻게 예수님이 그 일을 행하셨는지는 칼럼 마지막 부분에 가서 나누도록 하겠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음행하는 자 곧 불의한 자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다. 진짜 문제는 만일 당신이 그분을 거절한다면 유일한 구원의 길을 거절하는 것이며 당연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다. 당신은 하나님의 유일한 해결책을 거부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누가 천국에 못 들어가나? 우상 숭배하는 자는 왜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