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 예언의 올바른 이해: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존 파이퍼 같은 보수적인 개혁주의 목사님들은 예언의 은사(성령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있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이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성령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은사 지속론자(Continuationist), 그리고 초대교회 때 사도들을 통하여 한시적으로 부어졌던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들(방언, 예언, 초자연적인 치유)은 이제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은사 중지론자(Cessationist)라고 신학적으로 분류합니다. 짧은 글을 통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양쪽 진영의 모든 논쟁을 다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저번 글에(정말 하나님이십니까? – 잘못된 하나님의 음성) 이어서 성령의 은사 중 예언(Prophesy)에 관한 양쪽의 주장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마스터스 신학교의 모든 교수진들과 그레이스 커뮤니티교회의 장로회는 은사중지론을 교회론의 하나의 교리로 가르칩니다. 저희 Grace to Korea도 이와 같은 교리를 ‘우리가 가르치는 것’에 게시하였습니다. [1] (아래 주석 참조)

글을 시작하기 전에…  

1. 모든 은사 지속론자나 모든 은사 중지론자가 다 같지 않습니다 – 전 세계에 은사 지속론을 주장하는 단체나 교회의 범위는 오순절교회부터 제 삼의 물결까지 매우 넓고 다양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 연결고리는 초자연적인 성령 은사의 지속입니다. 이 글에서 다룰 은사 지속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극단적인 은사주의나 이단교리가 아닌 전통적인 복음주의 안의 “개혁주의 은사주의자(Reformed Charismatic)”라고 분류할 수 있겠습니다. 

2. 이 문제는 중요하지만 영혼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교리는 아닙니다 – 내가 은사 중지론자인지 은사 지속론자인지 아니면 둘 중에 뭐가 맞는지 아직 혼란스럽더라도, 올바른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라면 나의 구원의 상태가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의견이 불일치할 때, 이 사실을 상기하게 되면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마음으로 죄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성령의 은사에 관한 내용은 빈번하게 교회에 분열을 가져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2-14장은 바울이 성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을 강조한 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토론이나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눌 때,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말씀을 절대 놓쳐서는 안됩니다.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3. 기적에 관한 논쟁이 아닙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가 주제입니다 – 이 글은 오늘날에도 기적은 일어나는가 안 나는가에 대한 글이 아닙니다. 저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와 높으신 뜻 아래 언제 어느 순간에도 기적을 나타내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글은 구체적으로 신약성경의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가(특별히 이번 글에서는 예언), 여전히 오늘날 교회에도 있는가에 대한 글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와 동일한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4.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은사 지속론자들 – 앞에 질문에서 언급한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님의 책은 저희 학교의 몇 강의에도 필독도서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저희 학교 총장님이신 존 맥아더 목사님과도 각별한 사이이십니다. 또한 조직신학의 대가이며 은사 지속론을 주장하는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의 조직신학 책도 마스터스 신학 강의에서 주 교재 중의 하나로 사용합니다. 이분들의 성경적이고 풍성한 신학과 많은 양서들은 저와 같은 신학생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한국에도 은사의 지속을 주장하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높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많은 목회자나 성도 분들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 글은 견해가 다름을 무조건 비판하거나 반대의 주장을 깎아내리려는 목적의 글이 아님을 밝힙니다. 

예언(Prophesy)의 올바른 정의

개혁주의 은사주의자 중 한 분이신 존 파이퍼 목사님은 예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설교자의 마음에 부어주시는 성경적인 진리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생각하는 방법에 있어서 우리 인간은 완전하지 않아서 실수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예언이 성경과 같은 수준의 절대성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존 파이퍼, Ask Pastor John, Episode 215, 0:51–1:28.). 

파이퍼 목사님께는 예언의 은사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불완전한 것이라고 정의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언이 이처럼 새롭게 정의되는 것에 우려를 표합니다. 지난 글에서도 잠시 살펴보았지만 성경에서 예언은 신구약 동일하게 언제나 실수나 오류가 없으며 100퍼센트 정확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항상 음성이나 글의 형태로 온전하고 명백하게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정의하는 예언은 마음속의 어떤 깊은 인상이나 애매모호한 느낌, 그리고 오류 투성의 예언들도 성령의 은사라고 여겨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예언의 은사가 아닙니다. 이제 아래의 몇 가지 요점을 통해서 예언의 은사에 관한 대표적인 은사주의의 주장을 살펴보고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은사주의의 주장: 신약의 예언은 불완전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은사주의자들은 신약시대 예언은 불완전한 예언으로서 절대적이고 완전한 구약의 예언과는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0-22절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범사에 헤아려’가 새번역 성경에는 ‘모든 것을 분간하고’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잘 분별하라’라는 권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은사 지속론자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언이 절대적이고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분별해야 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모든 예언을 분별하라고 바울이 권고한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의 예언자들의 예언에 오류가 있었다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요?” (존 파이퍼)

은사 중지론의 응답: 정말 그런가요? 예언을 분간하라는 명령이 신약의 예언은 불완전하다는 근거가 될까요? 하지만 지난 글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 시대의 예언도 분간해야 했습니다. 신명기 13:1-5절  18:20-22절을 다시 보시면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과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며 미혹하는 자들의 예언을 제대로 분간할 것을 명하십니다. 리트머스 테스트에 실패한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죽여야 했습니다. 

때문에 은사 지속론자들이 주장하는 것, 즉, 신약의 예언은 분별이 필요했기 때문에 구약의 예언들과는 다르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에도 진짜 예언자들의 예언은 틀림없이 정확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언을 분간해서 거짓 선지자를 가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팽배했습니다(신13:3; 사30:10; 렘5:31; 14:14-16; 겔13:2-9; 미3:11). 신약시대에도 예수님과 사도들은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분간하여)’라는 말씀이 이제 이해가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라는 명령은 왜 필요했을까요? 맥아더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잘못된 가르침이 만연하고 있었고 그것이 바울이 편지를 쓴 주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예언을 들어도 신중히 분별하지 않고 바로 멸시해 버리려는 풍토가 생겼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런 명령을 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가운데에 진짜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모든 예언을 멸시하지 않고 잘 분별했어야 합니다.” (존 맥아더, Strange Fire(다른 불), 125p.)

결국 신약의 예언 또한 절대적이고 오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주장하는 자들을 이 기준 앞에서 심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2. 은사주의의 주장: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예언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언의 은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절대적이지 않고, 종종 맞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오류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이다. 성령의 예언의 은사는 100퍼센트 정확해야 했던 구약시대의 예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신13:1-5; 18:15-22). 그리고 성경을 대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예언은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성경의 적용에 있어서 구체적인 정보를 준다(웨인 그루뎀, Kingdom and the Power, 81).

은사 중지론의 응답: 은사 지속론 자인 웨인 그루뎀은 이와 같이 구약시대의 예언과 신약의 예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눈여겨볼 것은 신약에서 예언의 은사를 언급할 때 구약에서 쓰는 언어와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로 넘어오면서 예언이 낮은 등급으로 격하한 것이 아닙니다.

은자 중지론자인 Samuel E. Waldron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약과 구약은 나란히 선지자와 예언을 지칭할 때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 사도행전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다음의 구절에서 언급합니다. (행2:16; 3:24, 25; 10:43; 13:27, 40; 15:15; 24:14; 26:22, 27; 28:23) 그리고 동일하게 신약의 선지자와 예언을 지칭하는 구절들도 어떤 구분이나 설명 없이 함께 사용된다. 행 2:17–18; 7:37; 11:27, 28; 13:1; 15:32; 21:9–11.” (Waldron, To Be Continued?, 68p.)

이 성경 구절들을 신중히 살펴 면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선지자와 예언의 본질과 권위를 기록함에 있어서 신 구약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를 토대로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예언은 동일하게 한 점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17절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내려오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온전하고 동일한 은사가 시대에 따라 뒤떨어지거나 열등하다고 결론 내릴 명확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이렇기에 오늘날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면 구/신약시대와 같은 동일한, 한 점 오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와 같은 예언이 아니라면, 성경의 기준에 따라 그 예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닐뿐더러 그 예언하는 자도 거짓 예언자입니다.

3. 은사주의의 주장: 왜 예언을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가?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 14:1)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고전 14:39)

은사 지속론자들은 오늘날 성도들이 이 구절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은사중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넌지시 암시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낼 당시는 성령의 은사가 여전히 교회에 부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사실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 바울이 언급한 은사의 목록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오늘날 이 구절을 적용하는 방법이 이 당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과 같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은사 지속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은 동일하게 오늘날의 성도들이 순종해야 하는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은사 중지론의 응답: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이 어느 시점 이후에 성령의 은사는 더 이상 없다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면 오늘날 이 구절의 적용은 이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과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2] (아래 주석 참조)

고린도전서 14:39-40절의 말씀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이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있었고 교회는 특별히 질서와 차례가 잘 지켜진(고전14:27) 방언을 금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언을 더 사모하라고 바울의 권고한 것은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에는 탁월하며 또한 통역이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14:5). 다시 말하면 이 바울의 지침은 문맥상 고린도 교회의 성도 개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게 주어진 명령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 성도 개개인에게 예언을 더 사모하라고 했다면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앞에 바울이 설명한 12장의 내용과 일맥상통하지 않습니다. 12장에서 바울은 여러 은사를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교회의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12:7-11)고 설명하고 각 은사는 그 은사에 맞는 역할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모두가 다 “선지자이겠느냐”(12:29)라고 반문했습니다. 만약 고린도 성도 모두가 예언의 은사만을 사모해야 한다면 교회에는 선지자밖에 남지 않는데 문맥상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하기를 사모하라”라는 바울의 명령은 통역이 필요한 방언보다는 통역이 필요 없는 예언을 교회가 더 우선순위로 두라는 권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14장에서 바울이 설명하는 예언과 방언의 차이와도 들어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4:1절의 “특별히 예언을 하라”라는 말씀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은사를 회중에서 행할 때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우선순위로 두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은사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모든 성도들이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한다면 그것은 고전14:1, 39절 말씀의 올바른 적용이 아닙니다. 

올바른 말씀 적용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나요? 오늘날 우리가 이 구절을 올바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이 그 당시 역사적인 문맥을 이해하는 것과 전체적인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것을 올바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구약의 각종 명령들을 생각해 보세요. 레위기에는 수없이 많은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들이 있습니다. 속죄일에는 양을 잡아서 우리의 죄를 씻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양을 잡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속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따라서 우리는 완전한 희생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또한 이와 같습니다. 성경 전체가, 특히 신약 성경이 성령 은사의 목적과 기능이 한시적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은 이 “예언하기를 사모하라”라는 말씀을 완전하고, 충분하고, 오류 없는,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라보며 “순종” 해야 합니다.

맺음말

성령의 은사인 예언에 은사에 대해 은사 중지론의 입장과 해석을 살펴보았습니다. 은사 중지론의 입장은 교회 시대를 통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믿음과 견해임을 알려드립니다. 지면의 한계상 예언의 은사에 관한 모든 논쟁을 전부 다 다룰 수는 없었습니다. 건전한 토론과 질문이 있다면 언제든지 Grace to Korea로 문의하시면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나중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방언을 비롯한 다른 은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심지어 성령의 은사가 활발했던 고린도 교회도 이 문제에 관해서 혼란이 있었듯이 오늘날도 예외는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일지라도 충분히 혼란스러울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일수록 더 깊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어떠한 혼란의 형태일지라도 언제나 성경 말씀이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권위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혹시 말씀이 나의 견해나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 부분을 보여준다면 바꿀 수 있는 겸손한 자세도 필요합니다. 

은사주의의 이단적인 가르침이나 성령의 은사에 대한 극단적인 가르침들이 전 세계적으로 팽배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은 은사 지속을 주장하는 목회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이지 않은 계시나 예언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또 얼마나 많은 소위 직통계시자나 예언자가 사람들을 꾀어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거나 탐심과 정욕을 채웁니까? “우리 교회만 아니면 돼”, “우리 교회는 괜찮아, 감정에 덜 치우친 교회야” 이런 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의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잘못된 가르침에 대항해서 같이 손을 잡고 대적하여 진리를 수호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양 무리를 이끄는 목회자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제는 애써 모른척하거나 한없이 긍정적인 말씀만 전파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을 직감한 순간 디모데에게 엄숙한 명령을 써 내려갑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딤후4:1)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4:2). 긍정적인 말씀의 전파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다음 구절에는 목회사역에 중요한 또 다른 막중한 책임이 주어집니다.

“..가르침으로 경책하며(reprove), 경계하며(rebuke), 권하라(exhort)”

“한없이 부드럽고 젠틀하고 상냥한 목자라고 할지라도 가끔은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이리를 향해 돌을 던져야 할 때가 온다” – 존 맥아더

[1] Doctrinal Statement, The Master’s Seminary: https://www.tms.edu/about/doctrinal-statement/

What We Teach, Grace Community Church: https://www.gracechurch.org/about/distinctives/what-we-teach

우리가 가르치는 것, Grace to Korea: http://gracetokorea.org/우리의-믿음/

[2] 성령의 은사는 언제까지? 이 질문은 또 다른 큰 논쟁의 주제입니다. 이 글을 통해서 그 논쟁을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간단히 요약한다면 은사 중지론자들은 오늘날 교회의 다수가 주장하는 성령의 은사는 성경이 정의하는 은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교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본질의 유일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딱 꼬집어서 성령의 은사가 이제는 멈췄다던가 계속 지속되고 있다던가 하는 명확한 구절(killer verse)는 없지만 성경 전체, 특별히 신약 성경의 가르침이 초대 교회 성령 은사의 1)목적과 2)기능 그리고 3)한시적인 특성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행2:17-21; 고전13:8-12; 엡2:20; 히2:3-4) 사도들의 시대는 특별했고, 성령의 은사의 주 목적은 사도들의 메시지를 확증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신약 성경 안에서도 성령의 은사는 점차 사라집니다. 손수건만 갖다 대도 병이 치유되고 귀신을 쫓았던(행19:12) 사도 바울도 사역에 마지막 무렵에는 아픈 형제들을 치유하지 못하고 놔두고 와야 했습니다(빌3:27; 딤전5:23; 딤후4:20). 또한 교회 역사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제는 완전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완성이 되었고 더 이상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로서 우리의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이 한 번도 전파된 적이 없었던 선교지에도 성경 말씀이 그들의 언어로 번역됨으로 영혼들이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는 사도 시대의 종료 이후의 오늘날의 교회가 추구하거나 기대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서추천: 존 맥아더의 다른 불 (책소개: 무질서한 은사주의의 실체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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