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 사랑을 버렸는가?

12월 28일, 이제 2020년 새해까지 4일이 남았다. 올해 성경 일독을 위해 신청했던 바이블 타임은 일정대로 계시록 17장을 읽을 차례이고, 올 2월부터 시작한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활동으로 쓰기 시작한 서평도 지금 막“제임스 패커의 절대 진리”라는 책으로 서른아홉 번째 책 서평을 작성했다. 2015년 3월부터 4년 3개월간 강론했던 누가복음 강해를 올 6월에 마쳤고, 9월부터 시작한 골로새서 강해도 계획대로 12월 22일 크리스마스 설교,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이야기”를 앞두고 마무리했다. 그의나라 출판사에서 두 번째 책인, “내 삶 사용법”이 9월에 출간되었다. 매년 100권의 책을 읽기로 했는데, 지금 읽고 있는 책 두 권을 다 읽으면 목표를 달성할것 같다. 2019년 한 해 동안 주어진 많은 일, 상담하고 교제했던 많은 성도, 주중에 주말에 함께 모여 찬양하고 예배했던 많은 시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빠짐없이 모두 참석하고 맡겨진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올 한 해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서술했는데(결단코 자랑이 아니다, 더 많은 그리고 가치 있는일을 성취한 그리스도인이 넘쳐날 것이다!), 그 이유는 많은 활동과 크고 작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정작 하나님과나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졌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많은 책을 쓴 솔로몬이 점점 하나님과 멀어졌던 것처럼, 책을 쓰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나를 가깝게 만들지 않는다. 많은 책을 읽는 것, 그것도 하나님에 “관한” 책을 읽는것 역시 하나님에 “관하여” 알게 하는 일에 유익하나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성경 일독(이독 혹은 수십독)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보장하지 않는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그 안에 참된 기쁨의 교제를 누릴 수 있지만, 때로 설교는 시간에 쫓기며 허덕이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한다. 은혜의 방편으로 주어진 예배 역시 인도자 역할을 하면 단순히 해야 할 일이 되기 십상이고, 성도와의교제도 참으로 즐겁지만 동시에 수고스럽다. 이처럼 잘못하면 은혜로 누려야 할 일들이 버거운 일이 되어 버린다. 교회에서 하는 봉사, 섬김, 수고가 모두 그와 같은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그리스도인, 그것도 교회에서(성경에서) 요구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에 겉으로 보기에 매우 충성스럽게 참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나아가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으로 그 누구보다 성경을 가까이 대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자기 삶에 적용하여 그 효력을 입증할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은혜의 방편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는 경종을 스스로에게 울리고 싶은 것이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주를 위해 많은 것을 하면서도 “처음 사랑을 버”릴 수 있다(계 2:4).

처음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명하시면서,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고 말씀하셨다(계 2:2).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칭 사도라고 말한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냈다. 진리를 수호하고 거짓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다.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계 2:3). 그들의 수고를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신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 곧 에베소 교회의 인도자가 한 해를 돌아 본다면 아마 이런 고백을 했을지 모르겠다.

올 한해도 정말 열심히 살았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견디고 참았는지 주님이 아실 거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진리를 선포했고, 거짓 가르침이 교회 침투하지 못하도록 얼마나 수고했는지 몰라. 정말 주님의 은혜로 충성스럽게 잘 살았던 한 해였어…

그의 고백은 교만한 고백이 아니다. 주님도 그의 수고를 인정해주셨다. 문제는 많은 수고와 인내와 행위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랑”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치명적인 문제다. 많은 수고를 모두 헛수고로 만들어 버릴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사.랑(first love)

에베소 교회가 회복해야 할 처음 사랑, 우리가 주를 위해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면서도 절대 잃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이 처음 사랑은 무엇일까?

혹자는 ‘사랑’이라는 말 때문에 뜨거운 감정을 먼저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단지 감정을 더 끌어 올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신 주님은 곧바로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명령하셨다(계 2:5). ‘처음 사랑’에는 ‘처음 행위’도 분명히 포함된다. 또 어떤 사람은 ‘처음’이라는 말 때문에, 처음 구원 받았던 그때의 열정을 회복하라는 의미로 주님의 책망을 해석한다. 하지만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위해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다. 단지 열정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 사랑’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과 ‘사랑’ 이 두 개의 단어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핵심 개념이 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관계’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순간인 ‘처음’부터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관계는 영원히 지속된다. ‘사랑’은 관계없이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은 ‘너’와 ‘나’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 일어나는 감정, 의지, 그리고 행위이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를 가리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라고 말씀하셨다. 주목하여 보라. 자신을 “나”라고 부르셨고, 그들을 “너”라고 부르셨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사랑을 낳는다.

그러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들이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는 것인가? 그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의미도 아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일까?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기초로 하지 않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목적으로 두지 않는 행위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처음 사랑을 가져야 하는 이유

올해로 결혼 12년 차가 되었다. 지난 7월 12일이 결혼 11주년이었다. 종종 아내와 나는 서로의 반응을 먼저 맞추고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 말하며 함께 웃곤 한다. 하지만 때로는 아내의 진지한 말을 들으면서도 아내가 느끼는 것에 공감하고 그 마음을 헤아려 주며 해결책을 함께 모색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그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남편의 의무에 충실하려고 겉으로 보기에만 잘 들어주는 경우가 있다. 귀를 막고 그만 이야기하라고 호통치는 것이 아니다. 듣고 있지만 그리고 잘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내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만드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일이 그렇게까지 즐겁지않다. 귀찮다. 빨리 대화를 마치고 내가 원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많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그와 같은 자세를 취하는가?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 일독을 위해 오늘 정해진 분량만큼 꼬박꼬박 성경을 읽는다. 하지만 얼마나 자주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려고 하는가? 우리 마음을 더 즐겁게 만드는 다른 일들을 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숙제를 하듯 대충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에 가는 일은 어떤가? 당신은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회중 가운데 그분을 높이는 일을 진정 사모하는가? 성도와 함께 모인 그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맺으신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함께 교제하고 풍성한 은혜를 나누시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가? 그래서 예배의 형식, 준비된 말씀이나 찬양의 질적 수준을 초월하여 교회가 함께 모여 행하는 모든 일 가운데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당신의 가슴은 뜨거워지는가?

어쩌면 당신은 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르다처럼 말이다(눅 10:40). 그녀가 주를 위해 많은 봉사를 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녀의 마음이 “분주”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그 많은 일로 분주해지자 염려와 근심이 그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정작 그녀가 섬기려 했던 예수님께 불평을 쏟아냈다. 주객 전도가 된 것이다. 주님은 그녀의 마음을 분주하게 만드는 많은 일을 내려놓고 차리라 몇 가지만 하든지 아예 한 가지만 해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셨다.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좋은 것은 많은 일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과의 더욱 친밀한 관계를 목적으로 둔 그 한 가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음 사랑’에 관한 질문들은 당신이 하고 있는 많은 일들을 무조건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일을 왜 하고 있는지 물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욕조 안의 아이까지 버리는 오류’를 범하여 그러니 성경을 많이 읽을 필요도 없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할 필요도 없으며, 교회 성실하게 출석하거나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성급하게 결론 내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하여 주님 입에서 토하여 버릴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 에베소 교회가 회복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잘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은 주님이 ‘안다’고 인정하신 많은 수고와 행위를 게으르지 않고 지속하면서 동시에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야 했다(계 2:5).

에베소 교회에게 ‘회개’가 필요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상관없이 행했던 모든 수고와 행위를 다시금 그 관계를 위한 수고와 행위로 행할 수 있도록 삶의 모든 방향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주를 위해 하고 있던 많은 일들을 내려놓는 등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바로잡는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해 하는 자들이 정말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주님을 위한 것인지, 주님을 위해 하고 있는지 점검해보는 것이다.

‘처음’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졌던 때, 그리스도인의 가슴은 주님으로 온전히 채워졌다.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즐거웠다. 모두 이해가 되서가 아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성도의 얼굴을 보러 먼 길을 이동하는 것이 하나도 수고스럽지 않았다. 성도의 얼굴을 볼 때 야곱이 에서를 보며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기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해도 불만이 아니라 찬양이 흘러나왔다. 내가 성도를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주님이 얼마나 이 일로 기뻐하시겠는가! 때로 설교가 어려워도 그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영혼이 즐거웠고, 어떻게 기도하는지 잘 몰랐어도 하나님께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 뭔가 어설프고 어리숙하며 들쑥날쑥하기도 했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이 팔딱팔딱 살아있었다.

이제 막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에서 이런 ‘처음 사랑’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한다. ‘나는 어디서 떨어졌을까?’

단지 콩깍지가 벗겨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살펴보면 주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팔딱팔딱 뛰고 있다. 에베소 교회에게 예수님께서 생각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일은 바로 이것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만들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이 정의하듯, 내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당신은 주로 인해 참으로 즐거운가? 주를 위해 행하는 모든 일 가운데 주를 즐거워하는가?

처음 사랑을 가지는 행위는 이 땅에서 계속해서 지속해야 할 행위이다. 안타깝게도 한 번 처음 행위를 가지면그 뒤로는 아무런 노력 없이 계속해서 처음 사랑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는 연약하여 한 번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과 꿀처럼 달콤한 관계를 맛 보았다가도 다음날 바로 냉랭하고 멀어진 관계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높이 평가한 미국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처럼 말이다. 그의 헌신적인 선교의 삶은 그가 남긴 일기를 통해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는데, 그의 일기에서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은 ‘그의 행위’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주님과의 ‘처음 사랑’을 계속해서 가지기 위해 노력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쓴 일기는 매일 그가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 다른 말로 처음 사랑을 가지기 위해 씨름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수고하고 노력한 수많은 흔적으로 채워져 있다.

2020년 나의 일기 속에 그런 흔적이 남기를 원한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일 속에 그런 노력이 담기기 바란다. 단지 주의 이름을 위해 수고하고 참고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 아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예수님의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분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싶다(벧전 1:8).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고 순종하기 원하고,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싶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1856 E. P. 프렌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