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중 하나(시편 1편)

성경은 어떤 면에서 보면 참 극단적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수 24:15)며 출애굽 2세대에게 당장의 선택을 요구하였고, 엘리야도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 18:21)며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도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 6:24)고 말씀하시며 재물과 하나님 중에 선택해야 함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26) 고 하시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극단적인 선택임을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은 참으로 두렵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요구하실까요? 내가 교회를 나가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고 그러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광신도’를 만드셔야만 속이 후련하신 걸까요? 이런 극단성을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그러해서 때로는 이런 명령들을 약화시키거나 무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감정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정말 어떻게 가르치고 있느냐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에 있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요구합니다. 시편 1편도 그렇습니다. 복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극명하게 대조하며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을 촉구합니다.

먼저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1-3절).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악에서 멀다는 것입니다(1절). 표현이 참 흥미롭습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걷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서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앉기]”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삶이 됩니다. 죄인은 이렇게 나쁜 데서 더 나쁜 데로 빠져들어 갑니다.

하지만 복 있는 사람은 이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꾀는 따르지만 죄인의 길에서 서지 않으니 어느 정도 복은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 모든 것에서 멀리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 죄에서 멀기만 하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서 멀어지는 대신에 반드시 가까워져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2절). 악인, 죄인, 오만한 자가 죄를 즐거워 한다면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즐거움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것저것 즐거워하는게 많은데 하나님의 말씀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에게 있어 최우선의 그리고 최고의 즐거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사랑하는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고 그분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계속해서 묵상합니다. 말씀으로 그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사실 이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라”와 “하지 말라”가 가득한 “율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율법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사랑”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전해 준 모세가 강조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신 6:5).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 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시편 119편은 그 완벽한 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의 세 번째 특징은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은 비유적으로 1-2절의 특징을 보이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적절한 곳에 심기어진 나무와 같아서 충분한 양분을 공급받아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열매를 맺습니다. 겨우겨우 살아가는 나무가 아니라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나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풍성한 삶을 약속한 사람들이 바로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삶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의 삶을 포함합니다.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을 이루는 삶은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들에게 이 이상 형통한 길은 없습니다.

다음은 악인입니다(4-5절). 악인들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말합니다.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4절) 3절과 정반대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 악인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지 않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그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떨지 모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보기에 형통한 삶을 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 기다리는 것은 풍성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입니다. 주께서 그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하실 때가 옵니다. 그때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마 3:12).

하나님께서 은혜를 때를 마감하시고 심판하실 때 악인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의인들과 함께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겨와 같은 삶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고 그에 따라 행동하며 그중 하나로 사는 사람의 결과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는 지금까지 설명한 두 길을 간략하게 정리합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시고 그들의 길을 아십니다. 그들의 삶에 관여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형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인의 길은 망합니다. 이 짧은 성경의 선언을 세상은 계속해서 부인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속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며 결국 손해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지금 보이는 것에 충성하며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 길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자, 여기에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현재 여러분은 둘 중 하나에 있습니다. 지금 어느 길을 걷고 계십니까?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결국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따르고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결과적인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따르고 계신다면 당신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여전히 죄와 세상을 기뻐하고 그것을 따르고 계신다면 당신은 이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멸망을 향해 가는 악인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세상에서 선한 사람으로 보이는지에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길을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당신은 이 두 길 중 어느 길을 따라 걷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