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2)

20190727 Love Is…(2)

성범죄를 일으키고 나서 회개도 하지 않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여 말씀을 전하는 한 목사의 교회 성도에게 “당신은 그의 죄가 아무렇지도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목사의 설교에서 나오는 능력을 보면 하나님이 여전히 그를 사용하신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바울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수사학에 뛰어나고 청중을 울고 웃게 하며 어쩌면 영적 교훈을 가슴에 콕콕 박아주는 달변가라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그 목사에게 사랑이 없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6절에 나오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사랑의 특성 때문이다. 

사랑은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5, 6)

사랑이 많은데 악한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사랑이 넘치는데 불의를 기뻐할 수 있을까? 사랑이 풍성한 사람이 진리가 아닌 거짓을 기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런 예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을 들여다봐도 이중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사랑하지만, 그래서 사랑을 베풀지만, 죄 많은 사람은 악한 것과 불의, 거짓을 사랑하기도 한다. 특별히 우리는 가르침의 은사가 사랑 없이 실천될 수 있는지 말씀을 통해 점검하는 중이기에, 탁월하고 능력 있는 설교자가 위와 같은 연약함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다면 사도 바울처럼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고린도교회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고(고전 1:7), 특히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였다(고전 1:5).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두드러졌던 곳이 고린도교회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랑 없이 그 은사를 활용하여 바울의 질책을 받았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강력한 꾸짖음을 들었다. 그러면 뛰어난 가르침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위와 같은 문제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럴 때 우리는 사랑 없는 가르침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악한 것을 생각하고 불의를 기뻐하는 설교

사랑은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6)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백성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담당한다. 자기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계명을 전달하는 것이다(롬 7:12). 그러므로 설교자가 다루는 말씀의 특성(선한 것, 의로움)과 ‘악한 것,’ ‘불의’는 절대로 함께 어울릴 수 없다. 빛과 어둠처럼 섞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하는 자는 절대로 ‘악한 것’이나 ‘불의’를 함께 전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자는 선하신 하나님에게서 악한 것을 받은 것처럼 설교하지 않는다. 거룩한 백성에게 더러운 양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문제는 설교자가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전달할 때 생긴다. 물론 설교자가 성경 구절을 낭독하기 위해 강단에 서는 건 아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성도에게 풀어 설명하기 위해 강단에 선다. 그래서 설교자의 특징과 관심사가 설교에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강단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자리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말할 때,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말했다(고전 2:4-5). 바울은 디모데에게 화려한 언변과 설교 내용을 갖추라고 말하지 않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했다(딤후 4:2). 설교자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나타내시고 그 진리를 통해 능력을 베푸신다. 그 누구보다 사랑이 풍성하신 설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진리로 충만하셨던 것처럼, 설교자는 세상의 철학, 지식, 지혜, 기술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므로 강단을 주로 자신의 목회 철학이나 교회 정치적 발언, 훈화 말씀을 하는 자리로 활용하지 말라. 성도들은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기초한다는 걸 볼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설교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것 이상이나 이하로 말하지 않는 겸손한 자세가 ‘악한 것’과 ‘불의’를 생각하지 않는 설교의 특징이다. 그것이 진짜 사랑 있는 설교다.

불의와 악한 것을 품은 설교의 예가 또 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한 대로 설교자가 자신이 가진 은사를 사랑 없이 활용하는 경우다. 고린도 교회 은사자들이 그러했듯이 자기 유익을 위해,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자기를 높이기 위해 가르치는 은사를 이용할 수 있다.

모든 은사는 다른 지체의 유익을 위해 성령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다. 그것을 자기 이름, 자기 영광,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의 목적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대부분 하나님과 설교자만 아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때로 다른 사람의 설교를 모아 자기 이름으로 설교집을 내는 등 실질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종종 정치적 결탁이나 개인의 유익을 취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교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교회 정치력을 발휘하기 위한 표적 설교나 특정인을 비방하는 설교를 할 수도 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성도의 돈을 탐하는 탐심이나, 개인의 명예를 높이려는 교만, 누군가를 찍어눌러 이기려는 시기와 질투, 편을 갈라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을 키우려는 야망 등은 사랑을 동반해야 하는 설교와 어울리지 않는 죄다. 성도들은 설교자의 의도가 사랑이며 그 속에 악한 것이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어야 한다. 성도들은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는 자라는 것을 설교 시간에 볼 수 있어야 한다(요 4:23). 설교자는 하나님의 제단에 예배를 드리러 가기 전에 자기의 마음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마음에 악한 것과 불의가 섞여 있지 않도록, 그리하여 하나님과 그 백성을 섬길 때 참된 사랑으로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설교

사랑은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악한 것’ 그리고 ‘불의’가 사랑이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진리’는 사랑이 반드시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진리를 외치기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절대 진리를 거부하는 다원주의 세상에서 성경만이 참 ‘진리’라고 외치면 뭇매를 맞기 딱 알맞다. 동성애, 이혼, 낙태, 간음 등 성경이 조금의 타협 없이 죄라고 지목하는 것을 죄라고 말하기 쉽지 않다. 죄라고 말하면 ‘사랑이 없다’는 평가가 바로 내려진다. 그것도 기독교 내부에서 말이다.

물론 전달하는데 지혜가 필요하다. 알맞은 태도(온유, 겸손)를 갖춰야 한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진리를 전할 것인가, 아니면 타협할 것인가. 진리와 함께 기뻐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와 함께하지 않는 것을 기뻐할 것인가. 많은 사람이 ‘사랑이 없다’고 혹평할지라도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여기서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감동으로 기록하신 성경, 성경이 곧 길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대중의 시선이나 생각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말씀의 진리와 함께 기뻐해야 한다. 때로 진리가 청중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하게 할지라도, 설교자는 진리를 외쳐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 그리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수많은 핍박과 따돌림 속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은 것이 바로 진리이다. 오늘날 설교자들 역시 같은 길을 가고 있지 아니한가?

성경이 말하는 천국과 지옥, 죄와 그 결과,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구원의 시작과 완성.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설교자가 함께 기뻐해야 할 진리이다(히 4:12). 어떤 이유로든 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않는다면, 이 진리를 바르게 외치지 않는다면, 그 가르침엔 사랑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설교

사랑은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사도 바울이 정의한 사랑의 마지막 표현은 엄청난 의지의 표명이다.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있다. 

설교자로서 정기적으로 강단에 서서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은,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설교는 일회적인 사역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적인 사역이다. 오랜 시간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사역이다. 그래서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정말 모든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설교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자면, 청중이 생각보다 잘 자라지 않을 때, 열매를 더디 맺을 때, 오히려 시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때,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며 계속해서 신실하게 말씀의 물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길 수도 있다. 교회가 자라지 않고 그대로 멈춰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말이다. 때로는 성도에 대한 원망이 생길 수도 있다. 성도가 죄에서 빨리 돌이키지 않고 계속해서 방탕하고 게으른 삶을 산다면 말이다. 설교를 위해 쏟아 붓는 눈물과 땀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실망감과 좌절감을 이겨낼 수 있는 게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인내한다. 사랑은 믿는다. 사랑은 바라고 끝까지 견딘다. 때로 우리는 한 편의 기가 막힌 설교로 청중이 뒤집히고 변화된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성도가 자라고 열매 맺는 건 하나님께서 신실한 설교자를 통해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말씀을 공급하신 것의 결과다. 그 일을 맡은 자들은 맡겨진 일에 충성한다. 그냥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충성한다.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며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듣는 이가 적든지 많든지, 성도가 뜨겁게 반응하든지 미지근하게 반응하든지, 사랑으로 말씀을 전파하라.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면서, 말씀을 충성스럽게 전하라.

사랑없는 가르침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설교자에게 ‘예언하는 능력’을 주셨다(고전 13:2). 성도들 앞에서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는 말이다. 바울은 그런 우리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당신이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한번 점검해보기를 원한다.

당신의 가르침엔 오래 참음이 있는가? 당신의 설교는 온유한가? 당신은 시기하거나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은 설교를 하는가? 혹시 당신의 가르침은 무례하지 않은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거나 성내는 설교를 하지 않는가? 악한 것이나 불의를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정말 진리를 기뻐하며 가르치는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설교를 하고 있는가?

꼭 공예배 중에 하는 설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적인 가르침이나 상담 중에 가르치는 은사가 사랑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당신의 가까운 사람에게 물어보라. 당신의 가르침에서 사랑이 느껴지는지 확인해보라.

어쩌면 당신은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와 뛰어난 전달력을 갖춘 설교자일 수 있다. 많은 사람에게 인기 있고 영향을 끼치는 교사일 수 있다. 풍부한 교리와 복음 중심적인 내용으로 채워진 훌륭한 설교문을 매주 만들어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당신을 가리켜 ‘뛰어난 설교자’라 부르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역사하심을 본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수많은 청중이 당신의 가르침이 탁월하다는 것을 증명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울은 단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 말한다(고전 12:31). “당신의 설교에는 사랑이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