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름(3): 정죄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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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신학, natural theology” (인간이 본래 스스로 하나님을 추론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믿음)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치솟고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이 성경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자연 신학의 사상과 반대되는 강력한 메시지를 제시한다. 바울이 이를 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창조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는 우리의 양심에도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이는 인간의 마음에 새기신 도덕법을 통해 일어난다 이야기 한다 (롬 2:15). 그러나 이러한 지식으로는 구원받기에 충분하지 않다. 바울은 로마서 1:18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죄인은 본성적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다 (에베소서 2:1).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어떠한 반응을 할 수 없는 죽은 시체인 상태라는 뜻이다. 즉, 이러한 상태의 사람은 길을 잃어 영적으로 무지하며, 복음의 찬란한 빛을 전혀 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이 자신의 추론력만을 가지고 도덕의 기준을 세우신, 즉 강력한 법을 주신 하나님이 계신다 결론 짓더라도, 죄인이 그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죄인이 그러한 추론(말씀과 상관없이 죄인에게서 나온 사고)을 가지고 구원을 얻을 선천적 능력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해 바울은 믿지 않는 마음의 실제적 반응은 주님의 진리를 억누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죄인의 본심이 악하고 부패했으며, 죄악되고 진정한 의를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불의한 마음으로 진리를 막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19-20)

여기에서 바울이 죄인 스스로가 구원을 얻을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이야기할 뿐이다 (롬1:20). 그렇기 때문에, 만물을 통해 나타난 일반 계시는 죄인을 구원하는데 충분치 않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1:21). 결국, 죄인이 자신의 이성과 양심의 길에서 조금의 희미한 빛을 발견하더라도 이는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사실, 죄인 스스로가 그 어둠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이 진실이 성경적 구원에 대한 이해의 핵심이다. 이 사실은 복음의 기초에 올려져 있다. 죄인은 스스로 진리를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인데,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사실은 잘못 받아들인다면, 그 뒤에 오는 성경의 중요한 모든 메시지를 놓치게 된다. 

사람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에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다(인간의 죄를 다루지 않고, 주님의 주권만 생각하는 것). 그러나 인류의 죄악을 먼저 이해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업적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이때에야 비로소,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주께서 죄인을 급진적으로 변화(구원)시켜 죽은 자에게 온전한 생명을 주실 때 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주님의 그러한 주권적 개입과는 별개로, 죄인들의 유일한 본능은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영적인 어둠이 지배하고 있고, 그들의 생각은 점점 더 허망하여져 주께 대해 더욱 구부러진 태도를 보인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1:22-23) 

하나님의 창조는 그의 인격을 대변한다. 이는 창조된 세상에 자신에 대한 증언들을 곳곳에 심어 인류의 구조로 엮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고, 왜곡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주님의 존재와 본성에 대한 증거는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희미하고 깜박이는 불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죄인들은 그러한 증거 마저도 없애려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받는 비난은 정당하다.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죄인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어떻게 그의 완전한 타락과 부패로 이어지는지를 묘사한다. 그것은 또한 사악하고 뒤틀린 혈통으로서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인간사 가운데, 이러한 헛되고 혐오스러운 악순환이 반복되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지식인 가운데, 작가 폴 존슨은 루소, 칸트, 그리고 서양 문화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여러 위대한 사상가들의 일련의 이야기들을 공유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그들의 뛰어난 재능과 별개로, 그들의 삶의 타락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의 명석함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한 글들의 지능이 로마서 1장에서 말하는 비참한 타락으로부터 그들을 구할 수는 없었다.

자연 신학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바울은 분명하게 이야기 한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1:29-32)

결국, 회심하지 않는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 보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선두주자가 될 것임이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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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1): 모호한 태도의 지도자들 다른 이름(2): 좁은 문을 넓은 문의로 바꾸는 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