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당신을 꿰뚫어 보십니다. (시편 139편)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여러분들이 많이 아시는 ‘나를 지으신 주님’이라는 찬양의 후렴 구절입니다. 이 찬양의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후렴으로 들어가면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가사로 표현됩니다.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아름다운 가사가 아름다운 멜로디와 어우러져서 우리에게 위안과 평안을 주는 찬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행동, 생각, 나의 전부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언제나 우리에게 위안과 평안을 가져다 줄까요? 여기 노래를 쓰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만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졌던 인물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한 평생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분의 영광과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많은 시를 남겼으며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그중에 많은 부분이 한 점의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이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다윗입니다. 시편 139편의 저자인 다윗은 이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내 이름과 내 모든 생각을 아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에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앞에서 살펴본 찬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의 범위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1절에서 다윗은 먼저 이렇게 고백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여호와여 주께서…나를 아시나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쉽게 고백하지만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그 말의 깊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모든 것을 모두, 그리고 전부 다 아십니까? 신학자들은 이 무한한 하나님의 지혜(시147:5)를‘하나님의 전지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하나님의 온전한 속성(attribute)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삼위의 하나님 그분 자신과 그분 밖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하고 무궁한 지식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새로이 습득해야 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하신 본성에 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계시된 말씀으로 밖에 하나님을 알 수밖에 없지만 오직 한 분이신 참 유일의 삼위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완전한 자각과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마11:27,요1:18, 고전2:10-11). 또한 성경은 증언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전지하시며(마6:8, 히4:13), 성자 하나님께서 전지하시며(요2:24-25, 21:17), 성령 하나님께서 전지하십니다(고전2:10-11).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에 대한 완전하고 무궁한 지식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것입니다. 이 지식에는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포함되며 특별히 1) 시 공간 안에서 일어난 그리고 일어날 일 또한 2) 일어나지 않은 그리고 일어나지 않을 일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무한하신 뜻 아래 이미 정하신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십니다. 이 광활한 우주의 별들의 수, 바다의 모래알의 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정확한 시각, 새 하늘 새 땅에 입성할 성도의 수 등이 이 무궁한 지식에 포함됩니다. 과거 미래 현재의 일이 모두 다 하나님의 지식 안에 있습니다.

둘째로 심지어 일어나지 않은 일들 또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식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지식을 일컬어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연한 가능성” 혹은 “경우의 수”를 알고 계신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우연’ 주는 뉘앙스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다른 수단에 의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여지를 풍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안에는 어떤 우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무한한 경우의 수(가능성)들은 이미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식 안에 있으며 무한한 경우의 수가 일어났을 때 벌어질 무한한 결과 또한 하나님의 지식 안에 들어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무한한 지식을 가지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가능성이란 있을 수 없으며 단순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실행하지 않으신 것뿐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삼하12:8, 마11:21, 23). 

여러분, 몇 해전 구글의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을 기억하시나요? 컴퓨터의 인공지능이 모든 경우의 수의 알고리즘을 스스로 분석하여 바둑뿐 아니라 전 세계의 체스 장기 챔피언들을 쓰러뜨렸습니다. 슈퍼컴퓨터가 자기 스스로 셀 수 없이 많은 게임을 실시하여 빅데이터와 경우의 수를 학습했다고 합니다. 물론 비유가 완벽하진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모든 경우의 수뿐만 아니라 게임에 승리하기 위한 무한한 반대의 수를 알고 계시며 심지어 게임의 처음부터 끝까지 판 자체의 모든 수를 이미 그분의 뜻 가운데에 정하셨습니다. 실로 우리 인간에게는 충격적인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에 관한 모든 것(마11:27; 요1:18, 10:15; 고전2:10-11)을 아시며, 모든 사람의 신체 구조를 아시고(시139:13-16;마10:30; 렘1:5), 사람의 필요를 아시고(마6:8, 32; 눅12:30),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아시고(왕상8:39; 시7:9; 잠15:11; 렘11:20, 17:9-10; 눅16:15;요2:24-25; 롬8:27), 모든 사람의 수명을 아시고(욥14:5; 시39:4-5, 139:16; 행17:26), 인간의 타락을 아시고(창6:5; 시69:5; 렘16:17, 17:9-10), 사람의 영적인 운명을 아시고(롬8:28-30; 딤후1:9; 계13:8, 17:8), 미래의 일들을 이미 아시며(사41:22-26, 42:8-9, 44:6-8, 46:9-11), 모든 경우의 수를 이미 아시고(삼상23:10-13; 삼하12:8;왕하13:19; 시81:12-16; 렘26:2-7;마11:21, 23), 비밀스러운 일을 아시고(신29:29; 단2:22), 모든 것을 아십니다(히4:13, 요일3:20).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그러면 성경에서 마치 하나님께서 지식을 얻으시거나 벌어질 일을 모르시는 것처럼 시험하시거나 혹은 자세히 살펴보시거나 하는 표현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창세기 3장9-1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대화하시면서 마치 몰랐던 일들을 알게 되시는 듯한 대화가 나옵니다. 또한 오늘 본문 1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살펴”보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즉시 영원부터 영원까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알기 위해서 살피실 필요가 있을까요?(렘17:10)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특히 시가서나 지혜서에서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을 의인화(anthropomorphism) 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셔서 유한한 지식을 가진 인간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계시하시기 위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행동이나 감정, 인간의 몸을 예를 들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눈동자,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눈과 손이 있으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 등을 나타냅니다. 본문1절의 살피신다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살피는 것은 인간이 경험하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우리와 다르십니다.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분입니다. 챨스 스퍼전은 이 시편 139편의 1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표현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는 어떤 것을 알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필요가 없다. ‘살핀다’라는 말은 관찰함으로써 내가 모르는 것을 발견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는 절대로 적용될 수 없는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자세히 살피시며 우리 존재의 가장 은밀한 구석까지 파고드신 것처럼 철저히 아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You” 와 “I”가 쓰입니다. 이 전지하신 하나님과 나와의 깊은 관계를 묘사합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철저히 아시는지 자신의 노래를 이어나갑니다.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의 깊이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 다윗의 이 묘사는 앉고 일어섬, 두 양 극의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전체를 설명하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앉고 일어섬 이 두 행동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모든 움직임 전체, 하나하나 전부 다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직장과 교회에서 어떤 행동을 하셨습니까?집에 돌아와 방에서 어떤 행동들을 하셨습니까? 그 모든 행동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또한 행동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생각을 밝히 알고 계십니다. “나의 생각”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동기”나 “의도”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행동의 모든 동기와 의도를 알고 계십니다.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그 일을 하는 동기나 의도가 어떻습니까?혼자 있을 때 어떤 생각을 주로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생각을 아주 밝히 알고 계십니다. 

3절에서 계속됩니다. ‘나의 모든 길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다.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 이런 표현들은 역시 반복되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살펴보셨다는 원어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아신다는 의미를 넘어서 ‘평가하신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나서 죽기까지 모든 행동을 꿰뚫어 아시며 평가하십니다. 뒤에 나오는 구절에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또한 4절 다윗은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원어는 “내 입술에서 말이 나오기도 전에”라는 표현입니다. 내가 과거에 내뱉은 모든 말들, 지금 하고 있는 말, 아직 하지 않았지만 하게 될 말 모두를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말들을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신 모든 말들을 다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아까 처음에 불렀던 찬양이 기억나십니까?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이 아직도 마음에 평안과 위로가 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묵상하며 제일 먼저 드는 감정은 평안이나 위로가 아닙니다.바로 두려움과 경이로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부가 사람들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소위 ‘빅브라더’시스템에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입니다.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 완전히 발가벗겨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도 감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사생활은 없습니다. 다윗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의 무게 

5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6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7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다윗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다윗의 온몸과 신경을 겹겹이 에워쌉니다. 그 무게에 짓눌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윗의 이 감정을 5절에 느낄 수 있습니다.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둘러싸다”라는 원어의 뜻은 전쟁에서 부정적으로 “포위되다, 에워 쌓이다”로 묘사되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마치 성이 포위된 것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뒤를” 둘러싸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또한 “안수하셨나이다”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당신의 손바닥이 내 위에 있나이다”라는 뜻입니다. 보통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표현할 때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일반적인 히브리어 단어‘손’이 있지만 이 구절에서는 ‘손바닥’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탁자에 있는 벌레를 손바닥으로 잡는 것 같은 하나님께 완전히 사로잡힌 다윗의 감정을 전달받습니다.

6절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님!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합니다! ‘기이하다’는 단어는 어떤 기쁨이나 행복의 뉘앙스가 아닙니다. 초차연적인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사로잡힌 다윗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외의 표현입니다. 그 지식은 너무 높아서 그 끝에 다가가지도 못합니다.다윗은 이 하나님의 전지하심의 무게를 피해서 혼비백산 달아나고 싶지만,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어디로 도망간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가는 그 어느 곳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한 다윗의 노래의 첫 소절이 끝났습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맺음말

지금까지 다윗의 시편 139편 1절에서 7절까지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의 그 범위가 어떠한지 그 깊이가 어떠한지 또 그 무게가 어떠한지 다윗 감정을 흐름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이 어떠신 분인지 더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지면상 모든 구절을 살펴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관한 놀라운 진리와 그의 합당한 반응이 무엇인지 기록한 시편 139편의 나머지 구절들을 공부하시고 묵상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꿰뚫어 보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때때로 교만합니다. 나의 경험이나 생각이나 직관을 더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사55:8).” 여러분 인간이 아무리 잘났다고 그 지혜를 자랑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먼지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우리를 회개로 이끌어줍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시90:8).“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동,일상, 나의 말, 은밀한 생각과 나의 동기 모두 구석구석 꿰뚫어 보고 계시며 모든 죄악이 이미 주님 앞에 낱낱이 아주 환하게 비쳐져있습니다. 여러분,무릎 꿇고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끊임없이 묵상하심으로 모든 은밀한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십시오.

셋째로,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우리에게 위로와 확신을 줍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속의 은혜로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분께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별히 고난과 시련, 어려움 가운데에 있을 때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께 나아가 위로와 확신을 얻으시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전지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시편139편의 다윗의 찬양이 우리의 찬양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시139:17-18)“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제자였던 베드로의 고백으로 글을 마칩니다.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약함 또한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베드로를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큰 도구로 쓰셨습니다. 여러분, 결국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베드로의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는 똑같이 주님을 배신했지만 그들의 운명은 갈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세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21:17). 

The Master’s Seminary 재학중이며 Grace Community Church에서 존 맥아더 목사의 주일 설교를 한국어로 동시 통역하며, Korean Fellowship 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가족은 부인 에밀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