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너질 때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다. 기대가 무너질 때 그렇다. 내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기대가 뜻밖의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무너진다. 내가 이 정도의 노력을 하면 최소한 이 정도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속절없이 무너진다. 어떤 사람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기도 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이 맞지만, 반대로 최소한의 기대라고 생각한 것이 무너졌을 때도 형용할 수 없는 상심을 겪게 되기도 한다.

살다 보면 크든 작든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아주 잠깐의 감정으로 스쳐 갈 때도 있지만 때로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절망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수 없는 것 같은, 마치 전원이 꺼진 전자기기 같은 기능 정지의 상태가 된다. 그렇다고 딱히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선지자 엘리야가 그랬다.

엘리야

성경 속에서 엘리야는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성경은 기적에 대한 기록이 많기는 하지만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와 예수님과 제자들 시대를 제외하면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정도가 기적이 빈번하게 행해졌던 시대다. 특히 엘리야는 우리에게 ‘기적의 선지자’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그리고 많이 경험했던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특별한 사람이었다(왕상 19:10, 14).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기적으로써 자신이 참 선지자임을 증거하며 온 이스라엘이 바알이 아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기를 소원했다.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갈멜산에서의 놀라운 승리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바알의 선지자들이 밉고 그래서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했고 그것을 자기 사역, 더 나아가서는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위해 열심을 냈던 것이다. 그런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승리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아마 그동안의 모든 수고의 결실을 이제 거둘 때가 되었다는 기대가 가득했을 것이다.

형편

그런데 그가 본 “형편”(왕상 19:3)은 그의 기대와 달랐다. 형편이 달라져야 했는데, 동일했다. 이스라엘 중 바알의 제1의 추종자라고 할 수 있는 이세벨은 여전히 확고했다. 갈멜산에서의 일로 인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은 여전히 바알의 추종자였고 오히려 그 일에 대한 복수로서 엘리야를 살해하려고 했다(왕상 19:1-2).

엘리야는 이 상황을 보았다. 그리고 도망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그 앞에서 도망했던 것처럼, 그는 이제 이세벨 앞에서 도망했다. 그는 최대한 멀리 갔다. 유다의 가장 남쪽인 브엘세바까지 내려갔다. 엘리야가 단순히 현재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도망했던 것이라면 여기까지만 가도 충분하다. 이세벨의 영향력에서는 충분히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야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환을 두고 홀로 광야까지 하루 정도를 더 들어간다. 본능적으로 목숨을 위해 도망을 시작했지만, 지금의 그는 그저 부서지고 좌절한 마음뿐이다. 마음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의 기대가 무너졌을 때, 그의 마음도 무너졌다. 지쳐서 로뎀나무 아래 앉은 그의 기도를 들어보라.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무슨 말인가? 엘리야의 조상들, 엘리야보다 앞서 하나님의 일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엘리야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으로 바로 인도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과에 어 실패했다. 엘리야는 자신은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적의 선지자, 담대하고 강한 선지자로서 자신의 사역을 열매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야는 자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며, 그렇다면 이 땅에서 더 이상 쓸모없는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잠이 들었다. 긴 여정에 피곤하기도 했겠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엘리야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엘리야는 멈추었다.

하나님

여기까지 과정에서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잘 때, 성경은 “보라!”고 말한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빠져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설명하기 전에 짧은 감탄사를 넣어 주의를 끈다. 우리말로는 “자!” 정도가 될 수도 있고 “주목!”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열왕기상의 저자는 이 시점에서 특별히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무엇을 주목해야 할까? 바로 하나님께서 이제 엘리야의 ‘형편’에 개입하시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마음이 무너진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해 세 가지 정도 주목해 보자.

첫 번째,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신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어루만지고 먹이고 마시게 하신다. 엘리야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내적으로 무너진 그는 외적으로도 자신의 필요를 공급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엘리야의 연약함을 아셨고 그의 무너진 마음을 이해하셨다. 새삼스럽지 않다. 그분이 엘리야를 만드셨고 그동안 붙들고 인도하셨던 분이시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엘리야를 잘 아셨다. 엘리야가 단순히 표면적으로 구하는 것보다 그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지, 무엇이 더 좋은지 하나님은 알고 계셨고 그것을 주셨다.

두 번째, 하나님의 방법은 다양하고 정확하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에 도착해서 굴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9)고 물으셨다. 엘리야에게 있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했었다. 어느 곳에 가든 “왜”라는 질문에 그는 항상 “하나님께서 이곳에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이세벨의 위협 때문에 도망했다. 호렙에 오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역을 위해 그를 보내셔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엘리야는 여전히 무너진 마음으로 자신의 상황을 확대하고 과장하며 불평과 원망을 쏟는다.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하나님께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보시죠!”라고 쏘아붙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무언가를 보여주신다. 엘리야를 산에 서라고 하시고 강한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을 보여 주셨다. 이런 강력한 자연 현상 뒤에 열왕기상의 저자는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 모든 일에 있어 그것이 핵심이었던 것이다. 강풍, 지진, 불을 보며 엘리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강력한 자연 현상 뒤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다.

‘기적’의 선지자 엘리야가 기억했어야 할 또 다른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섭리’였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게 놀랍게 일하실 때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며 기뻐하며 감사하고 찬양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일하실 때가 훨씬 더 많다. 하나님의 조용한 역사, 섭리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 당장에 눈에 보이는 원하는 결과가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양하게 일하신다. 그리고 정확하게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최선의 선택이다.

엘리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갈멜산에서 놀라운 승리를 했을 때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셨고, 그가 이세벨로 인해 마음이 무너져 도망할 때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셨다. 달라진 것은 없다.

세 번째,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일하신다.

엘리야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제 가서 다메섹의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이스라엘의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할 것을 명하셨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를 끝낼 것을 말씀하셨다(왕상 19:17).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 뿐 아니라 아람의 왕도 폐하고 일으키신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이 일들을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분이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자신이 이 모든 일을 할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다. 엘리야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이다(cf. 시 33:10-11).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엘리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먼저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엘리야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은 이유는 우리도 그런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낙담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다. 크게 작게 우리는 이런 일을 반복한다. 그런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나도 그렇고 내 옆의 아내, 남편, 자녀, 부모, 이웃, 동료, 교회 안의 성도, 인도자들이 모두 그렇다.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주목’하느냐다. 내 상황을 주목한다면 상황이 변하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는 그저 이 상황의 피해자다. 무너진 마음, 절망, 좌절, 슬픔은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다. 이 상황, 그리고 이런 상황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 대한 미움과 원망, 불평도 자연스럽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달라지면 괜찮아질 수 있지만,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면 문제는 다시 반복된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너무나 당연해서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성경의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다. 마음이 무너질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함께 무너지기도 한다. 하나님을 나에게 나쁜 것을 주시려고 하는 분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이 나보다도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거나 혹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분으로 여기기도 한다.

성경의 하나님을 보라. 여기 마음이 무너진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을 보라. 하나님이 정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분이신가?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다. 기대가 무너질 때가 있다. 지금 당신이 그런 상황에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런 상황이 곧 당신에게 닥칠지 모른다. 언제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성경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의 시각으로 당신과 당신의 상황을 바라보라. 하나님은 당신의 상황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도 않으신다.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은 (비록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최선의 때에 최선의 방법으로 주신다. 실수하지 않으시고 실패하지 않으신다. 마음이 무너질 때, 이 하나님을 바라보라.

Grace to Korea 의 자문 목회자, 고정 기고가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웹 사이트의 모든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The Master’s Seminary를 졸업하고 현재 유평교회에서 학생회를 담당하는 목회자로 섬기고 있으며 주일, 수요일에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내 김미경 자매와 2008년 결혼하였고, 슬하에 아들, 이제를 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