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속에소금을두고서로화목하라하시니라”(막 9:50)

조금은 생소한 명령이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Have salt in yourselves).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명령, “그리고 서로 화목하라”(and be at peace with one another).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의 이 명령은 39절부터 시작되는 가르침 마지막에 나온 것으로 요한이 한 말 때문에 이 명령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막 9:38)

요한의 별명은 “우레의 아들”이었다(막 3:17). 그 우레같은 성격으로 엄격하게 대한 사람이 있었는데(“어떤 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주의 이름”) 귀신을 내쫓고 있었다. 그것을 본 요한과 다른 제자가 ‘너는 우리와 함께 다니지 않으니 당장 하던 일을 멈춰라’라는 식으로 그를 꾸짖었다. ‘너는 우리 무리에 속하지 않았으니 우리 주님 이름으로 일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요한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칭찬해주실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바로 직전에 요한은 길에서 다른 제자들과 서로 토론한 것으로 예수님의 꾸중을 들은 적이 있었다. 길에서 그들은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했다(막 9:34).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서 겸손을 가르치셨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고,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막 9:35).

이번엔 다르다. 요한은 열두 제자 가운데 으뜸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 무리는 한 팀으로 생각하고, 그 무리에 속하지 않은 자를 그들보다 낮게 여긴 것이다. 항상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특별한 제자들은 뭔가 다르지 않겠는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보다는 적어도 높지 않겠는가? 이번엔 예수님께서 ‘그래 잘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잘 생각해보면 요한은 귀신을 내쫓은 사람을 예수님과 그 무리 속에 포함하지 않았던 것 같다. 팀을 나눈 것이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이란 표현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포함하여 열두 제자 그리고 함께 다녔던 무리를 귀신 내쫓은 사람과 구분하여 “우리”로 구분한다. 예수님이 온 천하에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모든 자의 “주님”으로 오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듯하다. 예수님은 자기들만의 주님이고 그 사람의 주님은 아니다.

어린아이들이 서로 놀이를 할 때, “예수님은 우리 편!”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가끔 어른들도 이런 착각을 한다.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을 많이 신뢰한 선수나 팀을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다는 착각이다. 마치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대상만 편드시는 분인 것처럼,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도 그와 함께하지 않으신다고 판단한다.

예수님은 이 생각을 먼저 바로 잡으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

쉽게 말하면, “그 사람도 우리 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하신 것일까?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막 9:39)

예수님은 자기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사람이 예수님을 대항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그런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비록 예수님을 열두 제자처럼 따라다니며 유사한 방식으로 훈육 받고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반대하거나 비방하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었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분의 능력이 선포되며, 그분의 이름이 전파되는 일이었다.

그거면 됐다. 참으로 예수님을 위한 일이면 됐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면 됐다. 예수님의 능력과 이름이 바르게 선포되면 그걸로 충분했다. 열두 제자가 했던 방식대로 먹고, 자고, 일하고, 배우고, 따르고, 섬기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베풀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필요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말 예수님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는 역할을 제대로 하는가에 있었지, 어떤 방식으로 어떤 무리에 속해서 하는가에 있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일하고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주님”이셨다.

진리를 사모하고, 제대로 가르치기를 원하며,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 원하는 이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문제가 여기에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만 예수님을 위해 일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우리만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예배를 드려야 옳다. 우리 같은 스타일의 설교만 진짜 설교다. 우리와 같은 교회 정치를 가져야 올바르고, 우리같이 침례를 줘야 맞다. 우리 같은 복장 규정을 갖춘 교회가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고,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이 진짜 좋은 성경이다. 우리가 부르고 연주하는 예배음악이 하늘나라에서 드려질 참 예배음악이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진짜 복음이다. 예수님은 우리 교회의 참된 터가 되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신다. 다른 곳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우리”가 아니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진정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가?

예수님은 그렇다면 우리를 위한 자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올바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위한 일이란게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무시한 채, 순수한 열정과 감정을 가지고 한 일이니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도 주를 위해 하는 것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것을 생각해보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모든 일꾼이 해야 할 일이다. 그가 바로 예수를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위한 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위에 더 많은 전통과 규례를 만들기 좋아한다. 바리새인처럼 말이다. 그 모든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우리는 그들을 “우리” 안에 포함시킨다.

하지만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자세히 이 말씀을 읽어보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말씀을 읽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주님을 위해 내가 물 한 그릇 대접하면 거기에도 상을 주신다고 하셨구나’

하지만 다시 제대로 이 말씀을 읽어보자. 누가 상을 잃지 않는 것인가?

‘누구든지’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너희”) 물 한 그릇을 내민다. 무슨 이유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상을 주실 것이라는 말이다.

반대로 누구든지 우리 눈에 보기에 작은 자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신다. 한마디로 못 할 짓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죄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다.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손, 발, 눈이 죄를 범하게 한다면 차라리 그것을 제거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막 9:43-49). 진정으로 예수님을 위하는 삶은 희생과 절제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에 대한 설명이자 동시에 쉽게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며 실족하게 만드는 우리를 향한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다.

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는 표현을 하셨을까? 어쩌면 요한과 그 무리에 비해 귀신을 쫓아낸 그 사람이 적은 무리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그들 가운데 있는 어린아이를 세워 두고 ‘너희가 볼 때 이렇게 어리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나를 믿는 사람이라면 절대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교훈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그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이 좋을 만큼 심각한 죄라는 것이다.

참된 제자의 삶은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는 삶이다. 고난과 박해를 통해 정결해져야 한다. 죄를 삶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 수 있다.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형제자매를 구분하고 당을 짓는 것은 버려야 할 가장 큰 죄 가운데 하나다.

 이제 우리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수님의 이상해 보이는 명령이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와 “그리고 서로 화목하라”

그 전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말씀이다. 정말 소금은 당시에도 지금도 여러모로 쓸모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다.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마 5:13).

그러면 “너희 안에 소금을 두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너희가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을 두라는 말이다. 삶 가운데 죄를 몰아내라는 것이다. 주님은 고난과 박해, 모든 환경과 상황을 합력하여 우리 삶을 정결하게 만드실 것이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미리 정하셨다(롬 8:29).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실 것이다(골 1:22). 우리의 부르심, 우리 안에 주가 이루어 가시는 구원(거룩하게 하심)을 따르는 사람이 자기 안에 소금을 두는 자다. 제맛을 가지고 제 역할을 하여 좋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명령을 주목하자.

그리고 서로 화목하라

이 말씀은 ‘소금을 두라’는 명령의 구체적인 예시이다. 동시에 요한의 태도를 바로잡는 적용 말씀이기도 하다. 같은 형제자매와 화목하라고 명령하셨다.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하여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을 모함하거나 구분하거나 비방하지 말라는 것이다. 

타협은 옳지 않다.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언제나 우리 입술에서는 “참된 것”이 나와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언제나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 입에 거짓이 조금도 없으셨고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동시에 은혜가 충만한 분이셨다. 바리새인이 만든 수많은 율법과 규율 아래 죄책감과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바리새인은 자기들 틀에 맞지 않는 모든 자를 구분하고, 자기들 무리에서 내쫓고, 비방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믿는 자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그 절정은 십자가 위에서 드러났다. 자기의 피로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사랑하고, 참된 것을 추구하며,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기를 힘쓰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형제를 우리가 내쫓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자”라고 말씀하실 자매를 우리는 거부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자.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에 우리는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선포하기 원하는 열정만큼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기 원하는가?

Grace to Korea의 자문 목회자이시며 고정 기고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The Master’s Seminsry에서 M.Div와 Th.M(신약전공) 과정을 마친 후, 현재 유평교회의 담임 목회자이며,  Master’s University에서 성경적 카운셀링의 대학원 과정을 마친 아내 김 선미 자매와 2008년 결혼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야고보서 강해’, “정직한 크리스챤의 질문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