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교훈으로 양육받을 기회를 박탈 당한 자녀

성경:  에베소서6장4절,

2018년 8월 29일 국민일보에 <“초등 저학년 오후3시 하교” 추진에 “업무 많다” 반발하는 교사들>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났다. “맞벌이 부부의 아이가 일찍 하교하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위험할 수 있다는 지적”에 학내 돌봄교실을 운영했지만 수용 인원을 초과하여 결국 부모의 퇴근 시간까지 사교육 ‘뺑뺑이’를 돌리며 맡기는 현실을 해결하고자 저학년 하교 시간을 늦추는 방안을 낸 것이다. 오후 1시까지 학습시간을 마치면 휴식과 놀이시간으로 3시까지 아이를 봐주는 방안이다. 이에 현장교사들이 “업무가 많다”고 반발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수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민간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훨씬 편하게 일하면서 그것 하나 해주지 못하냐고 ‘반대하는 교사’를 비판하거나, 아이를 낳고 자기가 돌보지 않는 부모의 무책임함을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기사와 댓글을 읽으면서 이 열띤 논쟁 속에서도 아이의 가치와 중요성은 무시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네가 이왕 하고 있는 일, 좀 더 맡아서 돌봐라!’ ‘싫다! 네가 낳았으니 네가 책임져라!’ 서로 떠넘기고 있는 어른들 중간에 끼어있는 아이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맞고 있는 현실이 이렇다. 아빠와 엄마는 밖에 나가 일하느라 바쁘고, 자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바깥에 맡겨진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돌봄교실, 학원… 수년 전만 해도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맞이하는 엄마가 있는 집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집이 훨씬 더 많다.

방과 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면서 “우리 집에 같이 안 가실래요? 어차피 집에 가도 아무도 없어요”라고 해맑게 말하던 한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어린 나이에 집에 가도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다니,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걸까?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소중한 영혼을 이렇게 방치해도 좋을까? 크리스천 부모는 어떻게 이 현실을 마주해야 하나? 현대 사회의 거대한 흐름을 따라가도 좋을까? 아니면, 과감하게 더 귀중한 가치를 붙잡기 위해 무모해 보이고 손해처럼 보여도 그 흐름을 과감하게 거스르는 것이 옳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에 있다. 성경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에 관해 침묵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자녀를 양육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그 뜻을 숨기지 않으셨다.

먼저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 세대를 어려서부터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라고 하셨는가에 있다. 유대인들이 정말로 소중히 여기는 “쉐마”가 기록된 신명기 6장에 그 내용이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 명령은 당시 말씀을 듣던 자들뿐만 아니라 아들, 손자까지 평생에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주신 명령이다. 그들이 대대로 장구한 삶, 복 받는 삶, 번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이 말씀을 반드시 자녀와 손자들에게까지 전수해야 했다.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약속한 복은 오늘날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복이 만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고,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복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제 어떻게 이 내용을 가르치라고 하셨는지 살펴보자. 모든 부모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명령에 순종해야 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어떻게? 부지런히. 언제, 어디에서? 한 마디로 언제 어디서든지. 집에 앉았을 때, 길을 갈 때, 누워 있을 때, 일어날 때, 심지어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여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볼 수 있게 하라고 하셨다(신 6:8-9). 자녀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할 것을 이렇게 최선을 다해 가르치라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다.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명령을 받았을 때 그들은 이미 전 세대의 실패를 봤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거역했다가 광야에서 모두 죽임을 당한 세대의 자녀들이 이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 자녀와 손자까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여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었다. 후에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진 다윗은 백성에게 같은 가르침을 전하였고, 이 일에 실패했을 때 이스라엘이 영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역사서와 선지서가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특히 울면서 노래한 예레미야의 부르짖음은 참으로 처절하고 안타깝다.

그들은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모든 민족 가운데 누렸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발로 차버리고 온갖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되었다. 

신약시대 부모의 역할은 구약과 달라졌을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에게 편지를 쓴 것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자녀를 하나님의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령한다. 먼저, 아버지들에게 한 명령이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아버지의 역할은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부모에게 명령한 것과 다름이 없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교훈과 계명에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상대명령을 위임하셨는데 요약하면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마 28:18-2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부모가 가장 먼저 제자로 삼아야 할 대상은 누구겠는가?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의 명령을 가르쳐 지키게 할 대상은 누구겠는가? 가장 사랑하고 잘 되길 바라는 나의 자녀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자녀 교육의 책임이 궁극적으로 남편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은 가정의 리더로 남편을 세우셨다. 그 말은 책임이 남편에게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내와 자녀에게 필요한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고 있다면 잘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급자로서 남편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이 공급해야 할 것은 단지 물질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적 필요 역시 남편이 공급해야 한다.

늦게 퇴근하고 야근이 잦고 주말에도 할 일이 많고 쉬고 싶고…이유는 끝도 없을 것이다. 필자도 일주일에 2~3일을 새벽 2, 3시까지 회식하고 주말이 없이 일하는 지독한 제약영업을 한 적이 있어 그 삶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귀한 생명, 천하보다 귀한 영혼, 내 자녀에게 물질적인 필요만 공급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만복의 근원인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상관없는 복을 자녀에게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라는 것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할 책임, 하나님은 그 책임을 아버지에게 물으신다. 그 책임을 놓치 말라. 포기하지 마라.

바울은 늙은 여자에게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라고 말하면서 그 가르칠 내용에 “자녀 양육”을 넣었다. ‘자녀를 사랑하는 일’은 어머니의 당연한 역할이다. 또한 바울은 교회에서 돌봐야 할 모범적인 과부의 조건에 “자녀 양육”을 포함시켰다(딤전 5:10).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 2:4-5)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딤전 5:10)

요즘 같은 시대 여성은 집안일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큰일이 난다. 위의 말씀을 가지고 여성은 “집안일만 하라고 했다”고 주장한다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성경엔 여성 장관, 여성 무역업자, 여성 인도자, 교사 등 다양한 일을 하는 여성상이 등장한다. 잠언 31장에 나오는 이상적인 여인인 “현숙한 여인” 역시 장사하고 포도원을 일구고 베로 지은 옷과 띠를 만들어 상인에게 팔았다(잠 31:24).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 본문을 오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이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거나 본문을 뜯어고치려고 많은 시도를 한다.

우리는 양극단에 빠질 필요 없이 본문 자체가 강조하는 것이 집중해야 한다. 바울은 젊은 여자에게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신중하고 순전한 성품을 강조하고 있고, 그들이 하는 주된 역할로 집안일을 하라고 말한다. 가정의 리더인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하나님이 최초에 부부를 만드실 때 설계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남편과 아내를 만들어 짝지어주셨을 때 각각 그들에게 요구하신 역할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 즉 생육하고 번성하며 피조물을 다스리는 일을 했지만(창 1:28), 각자가 맡은 역할에는 차이가 있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그들이 받는 저주를 살펴보면 각각 자기 영역의 일에 문제가 발생하는데, 남편 아담의 경우 일어난 범죄에 대한 책임을 리더로서 물어야 했다(하나님은 먼저 범죄한 하와가 아니라 아담을 찾으셨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하셨다. 가정의 필요를 공급하는데 어려움이 생겼다(창 3:17-19). 아내 하와의 경우 임신하는 고통이 생겼다. 그리고 남편 위에 자기 권위를 세우려는 문제가 생겼다(창 3:16).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창조 질서에 기초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설명한다(엡 5:22-33). 

우리는 여기서 남편은 가정의 리더(엡 5:23-25), 공급자(엡 5:23, 28; 창 3:17), 보호자(엡 5:28) 역할을 하고, 아내는 남편의 리더십 아래 순종하고(엡 5:22-24; 벧전 3:1), 돕는 배필로서(창 2:18)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남편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엡 5:33) 알 수 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젊은 여자에게 반드시 가르치라고 명한 내용이다.

다시 한 번 이상적으로 그려낸 “현숙한 여인”의 특징을 살펴보자.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자기의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잠 31:26-28)

바울이 가르치라고 한 내용대로 사는 여인이다. 비결이 무엇일까?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남편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태도(잠 31:12), 돕는 배필로 부지런히 일하는 삶(잠 31:13-27), 그리고 지혜와 인애로 자녀를 가르침(잠 31:26). 그녀가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자녀를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아내의 역할에 충성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맞벌이를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아이를 언제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는지, 퇴근할 때까지 자녀를 학원에 ‘뺑뺑이’를 돌리고 찾아오는 것이 옳은지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각자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일할 수 밖에 없고, 아이를 맡길 수 밖에 없는 모든 경우의 부모에게 죄책감을 더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상이 크리스천 부모에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현실, 이렇게 아이를 키우고, 부모가 다 일해서 어느 정도 평수의 집에 어느 정도 수준으로 살아야만 하고, 아이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사교육을 받아야 하고, 남편 아내 모두 자기 커리어를 쌓고 하는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니, 아이는 부차적으로 다른 기관에 맡겨도 된다는 생각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에게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부지런히. 그 일에 장애를 가져오는 모든 것은 과감히 포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한때 매일 드리는 가정예배가 필수였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주일학교 빠지지 않고 보내도 감사한 시대다. 뭔가 가치관이 뒤집어졌다. 돈, 편리함, 안정, 즐기고 누리는 것, 여행 등 여러 가지 복, 번성을 부부가 자기를 희생하며 피곤함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추구하고 있지만, 정작 모든 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가르치고 전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가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기회비용’이라는 것이 있다. 맞벌이 하면 아이를 가장 최상의 양육자인 부모에게서 떨어뜨려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 그 누군가가 모두 일관성 있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사람’인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학교에 남겨두고, 학원에 돌려가며 의탁하는 것의 기회비용은 무엇일까?

들어가는 비용? 부모와의 친밀감? 물론 그것도 큰 기회비용이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아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울 기회를 박탈당하는 기회비용은 어떤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로부터 삶의 가장 중요한 원리인 “쉐마”를 배울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 그래서 집에 앉아있을 때, 길을 걸을 때, 누울 때, 일어날 때, 집에 들어갈 때, 나갈 때, 해 아래 인생을 헛되지 않게 만들어줄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가치를 배울 수 없다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엄마로부터 그 입술과 삶을 통해 하나님을 전해 들을 수 없다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아버지에게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 받을 수 없다는 것.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신발을 신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학원에 다니며 좋은 교육을 받지만, 영적으로 늘 궁핍한 상태로 결국 한 세대를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로 이끌어간다는 것. 이것만큼 뼈아픈 기회비용이 어디 있을까? 

갑자기 지옥에서 부르짖던 부자가 생각난다. “아버지여, 내 아버지의 집에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8).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눅 16:29).

누가 모세와 선지자들을 형제에게 듣게 해줘야 하는가? 누가 자녀에게 모세와 선지자를 전하여 괴로운 불꽃에서 건져 영원한 생명, 복의 근원이신 아버지 품으로 인도해야 하는가? 그 책임을 맡은 이들은 어린 아이들이 홀로 방황하는 이 시간 어디서 무슨 중요한 일을 하길래 이 일을 뒤로 제쳐두고 있단 말인가?

Grace to Korea의 자문 목회자이시며 고정 기고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The Master’s Seminsry에서 M.Div와 Th.M(신약전공) 과정을 마친 후, 현재 유평교회의 담임 목회자이며,  Master’s University에서 성경적 카운셀링의 대학원 과정을 마친 아내 김 선미 자매와 2008년 결혼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야고보서 강해’, “정직한 크리스챤의 질문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