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전 재산을 바치시길 원하실까요?

This entry is part 15 of 15 in the series 오용되는 성경 구절

당신은 때로 목사님이 한마디 하기도 전에 설교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하기도 한다. 어떤 성경 이야기와 구절들은 너무도 익숙하여 자연스럽게 적용으로 이어진다. “그 내용은 이미 알고 있어, 그러니 이제 그만해”라는 거만한 마음과 싸우는 것이 언제나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특히 교회에서 자란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누가복음에 나온 이 구절이 언뜻 보기에 비슷한 반응을 유도할 수도 있다.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고 처형되시기까지의 세세한 사건들을 기록했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그들의 선물을 금고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또 한 가난한 과부가 두개의 작은 동전(두 렙돈)을 넣는 것을 보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누가21:3-4).

당신이 만약 이 구절에 대한 설교를 듣는다면 자기 부정, 이타적 사랑, 겸손, 희생적인 양보나 빈곤에 대한 서약을 기대할 수 있고 이와 다른 해석을 생각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존 맥아더 목사의 누가 복음에 대한 설명한 것을 보면, 실제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희생적 드림)이 이야기에 주입되어 있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행동에서 주는 것(Giving)에 대해 아무런 원칙도 도출해내지 않으신다. 부자들이 돈을 적게 냈다고 혼내시거나, 과부를 칭찬하는 내용은 이 글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녀의 행동에 대한 진위를 판단할 수 없으며, 그녀의 태도나 그 정신에 대해서도 말할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 주는 것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해석 또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1]

아마도 이 말이 당신에게 충격으로 다가올지 모르겠다. 내가 처음 이 구절에 대한 존 맥아더 목사의 설교를 들었을 때 확실히 나는 그랬다. 하지만, 이 짧은 구절이 헌금을 드리는 우리의 태도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다른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이 구절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해 주님의 기쁨을 촉발하는 어떠한 달콤한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분명히 나타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 구절의 의미를 그저 유추하거나 추측 또는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은 그저 나쁜 해석일 뿐이다.

게다가, 만약 여러분이 이 구절의 중요 포인트가 주는 것(Giving)에 대한 교훈이라 생각한다면, 즉 예수님의 말씀이 과부의 헌금(없는 중에 바친 믿음)에 대한 칭찬으로 해석한다면, 여러분이 본문에서 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가진 전 재산을 본인에게 다 바치기를 원하며 당신이 궁핍한 삶 가운데 살길 원하신다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성경이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돈을 가지고 훌륭한 청지기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분명히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께서 누군가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누라고 말했던 유일한 경우는 부유한 젊은 청년과의 대화에서 였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른 종류의 구원을 길(선행으로)을 제시하시거나 기부의 본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닌, 젊은 청년의 참된 마음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누가 복음에서 나온 이 일화가 베푸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요점은 무엇일까? 성경의 저자인 누가와 성령 하나님은 왜 이 이야기를 복음서에 포함시켰을까?

누가 복음 21 장 1 ~ 4 절을 이해하기위한 첫 번째 단계는 이 구절이 주제나 생각의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이 말은 곧 과부가 헌금을 보관하기 전 후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본문 문맥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 말씀이 성령의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성경의 장과 절의 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때때로 우리 스스로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그 장의 단절(보기 쉽게 사람들이 장과 절을 나눔)은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사도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내몰기도 한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직전의 구절(누가20:45-47)은 예수님의 유대인 종교 엘리트에 대한 신랄한 질책을 담고 있다. 그리고 온 백성이 모두 들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리라.”

여기서 말하는 서기관 누구일까? 존 맥아더가 말하는 1세기 이스라엘 관직의 서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두 다 서기관은 아니었지만, 근본적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모세의 율법과 전통적인 랍비의 글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행위 구원론에 대한 신학적인 체계를 제공했다. 서기관은 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유대교를 지배하는 세력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재산, 계약을 포함한 모든 법적 문제를 다루었다. 그들은 존경을 받았고, 존경할 만한 랍비라는 칭호를 얻었다(마태23:7). [2]

하지만, 서기관들은 여러 면에서 부패했고, 그들의 위선은 온 나라를 감염시켰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오만함을 보여 주는 몇가지 예를 강조해서 비판했다. 하지만 그들의 부패는 교만에 국한되지 않았다. 존 맥아더의 설명처럼,

예수님은 또한 그들의 위선적인 탐욕의 사악한 측면을 폭로했는데, 그들의 탐욕은 사회의 가장 힘없는 자들을 먹이감으로 삼았다. 서기관들이 “과부의 집을 삼키려” 할 정도로 가난한 자들에게 까지 교활한 책략을 세웠다는 것은 거짓 교사의 특징인 부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미가3:5, 11; 벧후2:1-3, 14). 구약은 과부들을 보호하고 돌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출애굽기22:22; 신명기10:18; 14:29; 24:17-21; 27:19; 시편68:5; 146:9; 잠언15:25; 이사야1:17; 예렘22:3; 스가랴7:10). 하지만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환대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의 재산을 횡령하여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에 대한 담보로 집을 가져갔다. [3].

예수께서 “과부의 집을 집어삼키는 것”(누가20:47)에 대해 비난을 마치자마자, 청중들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생생하고 비극적인 현실로 맞이했다. 그 과부의 헌금은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사악한 종교 제도의 파괴적인 예였다. 그녀의 마지막 헌금을 통해, 즉 제도화된 행위-구원의 억압에 굴복당한 그녀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피를 다 흘려 버린 것이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그녀가 축복을 받기 위한 최후의 노력으로 “그녀가 살아야 할 모든 것”(누가21:4)을 포기했다고 하니, 결국은 그녀를 죽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낸 헌금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가 아니라 사람들을 괴롭히는 거짓 종교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이 과부의 이야기가 보여 주듯이 기만적이고 독선적인 종교는 약자, 즉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공격한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냈던 헌금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드린 예배의 거짓 종교가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한푼까지 빼앗아 갔다는 사실에 화가 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음 절에서 패역한 유대교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신다. [눅 21 : 5 ~ 6: 그리스도의 비판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존 맥아더 (John MacArthur)의 설교 “학대하는 종교”를 보십시오.]

돈은 언제나 사탄 숭배의 중심에 있어 왔다(누가16:14; 19:46; 베전5:2). 그리고 거짓 종교 제도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것은 초대 교회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4].

1세기 유대교의 부패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번영 설교자, 신앙 치료자들에게 육체적, 경제적, 재정적 축복을 찾기 위해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TV는 시청자들에게 금전적인 믿음의 씨앗을 자신들의 사역에 뿌리면 건강과 부의 막대한 축복을 얻을 것이라 약속한다. 부자가 되는 사람은 사악한 거짓 교사이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이에 속는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서기관에 대해 경고 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먹이로 삼는 늑대들을 충실하고 담대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주의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거짓 교사들의 속임수에서 자신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과부에 대한 이야기(누가 복음21:1-4)에서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사실은 거짓 교사들이 진실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재산을 낭비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늑대들이 주님의 양들을 비웃으려고 할 때 우리는 격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거짓 교사의 속임수에 잘 흔들리는 연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돌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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