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은 자에게 구할 것, 충성

성경에는 기적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지만, 인류의 전체 역사를 놓고 보면 언제나 그렇게 기적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특정 시기에 많은 이적이 나타난 시기가 3번 정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엘리야의 때입니다. 특별히 엘리야의 사역은 ‘기적’으로 특징 지을 수 있을 정도여서 그는 ‘기적의 선지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만큼 엘리야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 하심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말에 비가 오기도 하고 오지 않기도 했습니다. 병을 채운 기름이 떨어지지 않기도 했고, 죽은 아이가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바알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선택할 것을 촉구하며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입니다. 각자의 신을 부를 때 불로서 응답하는 신을 진짜 신으로 인정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 대결에서 승리하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제거합니다. 아마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가장 큰 희열을 느낀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9장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모습의 엘리야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낙담해 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일들을 모두 내려놓고 삶을 마감하고 싶어 합니다. 무슨 일이 그에게 있었을까요? 바로 앞의 상황을 보면,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인 것이 아합의 왕의 아내 이세벨에게 전해졌고,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목숨의 위협 때문에 엘리야가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 목숨의 위협은 이미 그가 경험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왕상 18:4). 또한 목숨을 부지하려고 도망한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왕상 19:4). 엘리야가 지금 이렇게 모든 것을 끝내고 싶어 하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그가 원한 것은 단순한 승리나 복수가 아니었습니다. 대결 전에 그가 언급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을 통해 바알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기를 바랐습니다(왕상 18:21). 그 대결에서 엘리야는 승리했고 모든 백성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39)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드디어 그의 사역의 결실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바알 선지자들의 우두머리격인 왕비 이세벨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은 엘리야가 하나님께 헌신되었던 것만큼이나 바알에게 헌신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바알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거나 바알을 버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이에 엘리야는 도망했던 것입니다.

도망한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구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이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지만 결국 그의 조상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결과, 즉 이스라엘의 전적인 회개는 없는 상황이 자신 앞에 있고 이젠 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왜 도망했냐고 물으실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14)

이 엘리야의 말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까지도 느껴집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을 때도 그렇게 하지 않고 지금까지 위험 가운데 살아남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그에게 돌아온 것은 결국 목숨의 위협뿐이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렇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의 처음에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것이 언급되어 있고 그 중간에 엘리야는 놀라운 승리를 했지만 19장에 와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이세벨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보기 원했던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놀라운 회개의 열매는 보이지 않습니다. 18장에서 19장으로 넘어오면서 보이는 엘리야의 극적인 변화는 그의 이런 결과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것이 가장 큰 요인입니다.

엘리야의 이런 모습이 의아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그리고 내가 원하는 어떤 결과라면 그와 다른 결과가 내 앞에 펼쳐질 때 우리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동안 해온 수고와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상황을 만날 때 우리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첫째는 사명 자체에 대한 질문입니다. 때로는 여기부터 잘못된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가장 위대한 도둑이 되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겠어.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 나를 부르셨어’라는 사명감은 올바를 수가 없습니다. 도둑질은 하나님의 뜻에 분명히 대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재능이나 은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단지 어떤 사역을 사모해서 사명감을 가지는 경우도 올바르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전혀 올바른 음을 내지 못하고 박자도 맞추지 못하는 사람이 한 번씩 진실한 마음으로 특별 찬양을 드리는 것은 감동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좀 더 애매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어떤 사역에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사역을 위해 가정에서의 역할에 소홀히 하고 그로 인해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면 분명 문제가 됩니다. 신념과 사명은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기 때문에 그것이 성경적으로 올바른지 반드시 점검해봐야 합니다. 올바르지 않은 신념과 사명에 삶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방법에 대한 질문입니다. 때로는 올바른 사명을 잘못된 방법으로 이루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본질을 잊고 지나치게 방법론에 몰두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법을 무시하는 것도 올바른 자세는 아닙니다. 사명이 분명하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충성과 신실함의 문제입니다. 농부가 씨만 뿌려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혹은 매일같이 잘 자라고 있는지 땅을 파서 확인하는 것도 올바른 방법은 아닙니다. 식물에 물이 필요하니까 무조건 물만 많이 준다고 해서 농사가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연구가 필요합니다. 내가 가진 재능, 자원 등을 어떻게 잘 사용해서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지혜롭게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결과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잘못된 방법으로 일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대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명도 확실하고 방법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내 생각과는 다를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럴 때가 많습니다. 엘리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백성들을 여호와께로 돌이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했었던 일도 아니고 잘못된 방법으로 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노력의 결과가 거의 눈앞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이세벨은 모든 그의 모든 수고를 원점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멈췄습니다. 그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친구에게 이런 일이 있다면 찾아가서 “넌 최선을 다했어. 괜찮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라는 위로의 말을 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엘리야를 위로하는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가진 ‘기대’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강한 바람, 지진, 불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전조로써 사용되었던 것들입니다. 선지자인 엘리야는 당연히 이런 갑작스러운 현상을 보며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실 것을 기대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에게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왕상 19:11-12). 강력한 하나님을 기대한 그에게 부드러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생각하지 않았던 방법으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일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바람이나 지진, 불 가운데 일하십니다. 이럴 때는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조용히 일하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다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렇게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나라를 멸하시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기대는 일의 결과가 아니라 일하시는 하나님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에 따라 내 방법으로 그저 ‘일이 되게’ 만들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여기 엘리야처럼 원치 않는 결과에 낙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보이는 결과에 쉽게 좌지우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교회 학생들이 공연을 했습니다. 음악에 맞춰 약간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무언극이었습니다. 음악의 시작에 무대에는 이젤이 몇 개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올라와 각자의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무슨 그림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하얀 종이에 검은 물감으로 장난을 한 것 같은 그림입니다. 그냥 선을 하나 찍 그어 놓은 것 같은 그림도 있고, 걔 중에는 뭔가 좀 있어 보이는 그림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다들 뭘 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조차도 이게 뭐지 하는 느낌입니다.

마지막에 그 각각의 그림들이 하나로 모입니다. 그렇게 그림들이 모이니까 알겠습니다. 각자가 각자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림을 나눠서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림을 그린 것은 학생들이지만 그들의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God is God>이라는 스티븐 커티스 채프먼의 곡에서 모티브를 얻은 무언극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큰 그림 안에서 맡겨 주신 일부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게 뭐를 위한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내 그림보다 다른 그림이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내 그림을 좀 다르게 그리고 싶기도 합니다. 이건 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색을 칠하고 싶기도 합니다.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그림의 궁극적인 주인이 아닙니다. 이 그림의 일부를 맡은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맡았는지 바로 알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가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충성’이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의심이 생길 수도 있고 낙심이 될만한 일도 있습니다. 결과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가시적인 성과가 곧 보일 수도 있고 나중에 보일 수도 있습니다. 평생 그런 것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된 수고와 노력은 결과와 관계없이 그 무엇도 헛되지 않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무궁하신 지혜로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하나님을 기대하며 충성을 다하는 것, 그것이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단 한 가지 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 4:2)

Grace to Korea 자문 목회자이며 고정 기고가로 봉사하고 계십니다. 사이트의 모든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The Master’s Seminary를 졸업하고 현재 유평교회에서 학생회를 담당하며 주일, 수요일에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내 김미경 자매와 2008년 결혼하였고, 슬하에 아들, 이제를 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