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성서의 시가서에 등장하는 욥은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면 몇 번이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욥기가 성경에 있는 까닭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을 실제로 믿으며 또 고난이 닥쳤을 때 바르게 반응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견뎌야 했던 바벨론 포로 시대의 고통 또한 그와 같이 힘든 것이었다. 욥의 고난은 그야말로 처참한 것이었으나 사실상 그의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예레미야의 고난은 국가 전체를 대신하여 부정하게 학대당했으며 끝내는 나라까지 빼앗겼다. 게다가 예레미야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동족 유다의 반역에 가담하지 않았다. 시종 그는 의롭게 행했으며 진실을 외치는 유일한 목소리로서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했다. 확실히 그의 고통은 심사숙고해 볼 만한 가치가 있으며 그가 보인 반응은 본받을 만하다.

고난에 대해 어떻게 바르게 반응할 수 있는지 몇 가지의 원칙 또는 가르침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며, 몇 차례의 기고(寄稿)에 걸쳐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 시대의 고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일부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현재 모든 게 순조로운 편이야. 내 말은 스트레스 없는 완벽한 삶은 없단 말이지. 그렇다고 한들 난 정말이지 아무 심각한 고통도 겪고 있지 않거든.” 이 글은 특히 그런 당신을 위해서다. 우리가 여러 시험을 경험하는 시련의 기간에 우리를 유혹하는 비성경적 태도, 생각 또 그러한 행동과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아직 고난 가운데 있지 않은 동안 명백한 고난의 신학을 앎으로 우리 자신을 갖추는 것이 가장 좋다. 고난에 대해 옳지 못한 반응을 막는 최고의 방어책은 고난을 맞이하기 전에 고난을 잘 견디기 위해 대비함에 있다.

그는 우는자들과 함께 운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 고난을 잘 견디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일까? 첫 배움의 시간에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예레미야는 동족인 유다와 같은 심경으로 함께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애가의 시작에서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은 예레미야 자신이 동족의 파멸을 애통해하며 한탄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이스라엘과 하나로 여기며 그들의 아픔을 나누어 가진다. 그는 이스라엘을 ‘그녀’라 인격화해서 부르며 마치 예레미야 자신과 이스라엘을 칭하는 ‘그녀’가 상호 교체 가능한 것처럼 말한다. 1장 2절에서 그가 하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녀가 밤에는 슬피우니 그녀의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그렇게 이스라엘을 묘사한 후, 예레미야는 ‘그녀’를 ‘나’라는 일인칭으로 바꾸어 표현한다. “이로 말미암아 가 우니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흘러 내림이여 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애1:16, 18, 20-21). 그런 다음 예레미야는 자신의 동족과 자기 자신을 일괄하여 일인칭 복수형으로 표현해 이스라엘을 자신과 동일시 한다(애3:40-47). 또한, 그는 선지자 예레미야로서 조국을 향한 자신의 눈물과 고통을 설명한다 (애2:11, 3:48-50). 예레미야 자신의 환난과 비탄(애3:1-4) 그리고 자신의 수치와 절망(애3:14-18). 그는 사십 년간 이스라엘에게 회개하지 않는 한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해 왔지만, 그들이 파멸에 직면했을 때 예레미야는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라는 적개심을 품고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참담함에 그는 자비로움을 보이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 거룩한 자비로움과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예레미야와 같은 감정으로 우리 안에 불러 일으켜져야 한다. 우리의 형제와 자매의 고통을 진심 어린 자비로움으로 그들과 같은 심경이 되어 함께 고통받고, 함께 울며(롬12:15), 서로 위로해야 한다.

만일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이러한 원리는 신약 교회의 사역으로 이어져 실행되고 있다. 고린도 전서12장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 지체로 한 몸을 이룬다고 말한다. 또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고전 12:27, 26)고 바울은 설명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는 것은(롬 14:7) 우리가 그분의 몸과 연합한 자로서(롬6:3-7) 주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롬 14:7). 만일 우리가 주님과 연합되어 있다면 서로 또한 연합되어 있다. (고전 12:12-14).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나사로가 죽은 후 예수께서 마침내 베다니에 오셨을 때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도 마리아는 깊은 슬픔에 젖어 집에 앉아 있었다(요11:20).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러 일어났을 때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녀가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만 생각했다(요11:31). 그러더니 너무나도 슬픈 나머지 마리아는 예수 계신 곳에 가서 그 발 앞에 엎드리어 말할 때 오라비의 죽음에 대하여 그 탓을 거의 주님께 돌리며 원망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11:32). 마리아는 비탄에 잠겨 있었다.

본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11:33) 그런 다음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유대인들은 그분이 나사로를 사랑하시어 눈물을 흘리신 것이라고 해석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슬픔에 겨운 마리아의 눈물이 예수님의 심령을 비통하게 하셨다고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에 살펴 주목하기 바란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불쌍히 여기셨을 뿐 아니라(예수님은 몇 분 안으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을 아셨지만) 오빠를 잃은 아픔에 처한 마리아의 고통에 같은 심경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형제자매들이여,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의 자비하심 또한 우리 안에 있음이 틀림없다. 예레미야도 바벨론 포로 시대의 예루살렘을 향한 이러한 자비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40년간 이스라엘과 함께 울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했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마침내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이 내려졌다. 그는 이스라엘이 자초한 이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될 단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팔짱을 끼고 냉담한 조소를 띄우며 “진작 내 말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았을걸. 이젠 너무 늦었어!”라는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기는 커녕 동족과 하나가 되어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예레미야애가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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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e 목사는 그레이스 교회(담임목사:존 맥아더)의 전도 사역을 담당하고 팰로십 그룹 GraceLife의 담당 목회자입니다. 그는 The Master's Seminary를 졸업하고 현재 신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