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상처는 나와 어떤 상관이 있는가?

BUCHAREST, ROMANIA - MAY 3: Hand of unidentified actor, nailed on wooden cross during realistic reenactment of the crucifixion of Jesus Christ on Good Friday on May 3, 2013 in Bucharest, Romania.

언젠가 화염 속에서 자식을 구하려다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은 어머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어머니의 그 얼굴을 부끄러워했지만, 자기를 대신하여 희생한 사랑의 증거라는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어머니의 부끄러운 상처는 아름답고 고귀한 영광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 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할까요? 피로 얼룩진 얼굴과 찢어진 손과 발, 벌거벗겨진 채 받은 온갖 조롱과 모욕,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몸으로 고통을 참아낸 부끄럽고 잔혹한 장면이 우리의 눈물을 흐르게 하고, 우리 무릎을 꿇게 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강력한 능력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의 부끄러운 상처가 우리를 위한 아름답고 고귀한 영광의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주간을 맞아 이 칼럼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난 상처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1. 그리스도의 상처는 나를 거룩하게 하신 상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질문은 “얼마나 고통스러웠냐”보다는 “무엇을 위한 고통이었느냐” 입니다. 인간의 육신이 당한 가장 극한의 고통 가운데 십자가형이 포함되겠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 십자가에서 같은 고통을 받고 죽은 수많은 사람의 고통과는 목적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분은 자기 피로써(죽음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기 백성을 대신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는 분명한 목적에 의한 자발적인 고난이었습니다(벧전 3:18).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어쩔 수 없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8).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는 그분이 생명을 버리는 데까지 이르는 고난을 택하신 이유는 우리 죄를 담당하여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벧전 2:24).

그리스도의 온몸에 난 상처는 내 삶에 일어난 거룩하고 아름다운 영적 치유의 반증(reflection)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사 53:5). 그리스도의 고통이 심할수록, 그분의 상처가 깊을수록, 하나님의 본체로서 받으신 고난의 부끄러움이 온몸에 사무칠수록, 그로 인해 내 영혼이 어떤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입었는지 끝없이 헤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은혜로운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옳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들의 고난이 추구하는 바로 그 목적입니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입니다(엡 2:7).

어머니의 얼굴에 흉칙하게 남겨진 부끄러운 상처는 화염속에서 질식하고 불타 죽어버렸을 자식이 지금 살아서 숨쉬고 누리는 모든 것을 위한 상처입니다. 어머니는 그 상처를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한 상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도 자기의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백성을 살리기 위한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의 상처는 내게 영광을 누리게 하기 위한 상처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죽기 위해 고난을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모든 고난의 마지막에 일어날 반전을 알리셨습니다. 그 반전은 바로 “부활”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참고. 막 8:31; 눅 9:22)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은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기 전에 거쳐야 할 과정이었습니다(눅 24:26). 잡히시기 직전 예수님은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1). 고난받을 때가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고난을 받으셨을 때 아버지가 그 아들을 기뻐하사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영화롭게 하셨고 이로 인해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행 2:32-36; 13:30).

그분은 고난받으신 후에 제자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셨습니다(행 1:3). 그리고 그분이 가르치신 내용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합당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고난을 통과한 아들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그분을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빌 2:9-11).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그와 함께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또 함께 일으키사(부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엡 2:6).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성도가 누릴 기업을 생각하며 찬송을 부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3,4,8,9)

깊이 잡아당긴 고무줄이 위로 크게 튀어 오르듯, 그리스도의 고난의 깊이는 그분이 다시 오르신 하늘 보좌의 영광을 더 찬란하게 드높입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나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하사 하늘 유업을 얻게 하셨으니, 이를 전부터 예비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엡 1:1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소망합니다(엡 1:12).

불 가운데 자식을 구한 어머니는 생명을 되찾은 자녀와 모든 것을 나눕니다. 어머니가 가진 모든 것이 자녀의 것입니다. 어머니는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자녀를 잠잠히 사랑하고 자기의 것을 누리는 자녀를 즐거이 부르며 기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크고 이타적이며 무궁합니다. 아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자기 영광을 영원히 나누기 원하십니다.

팀 켈러는 “예수님이 그 영광과 사랑을 고난을 통과하는 것 말고는 달리 보여주실 방도가 없었”다고 말합니다(“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두란노, 2018, 187p).

그렇습니다. 그분은 고난을 통과하여 우리에게 아버지의 무한한 영광과 풍성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을 영원히 우리와 나누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난 상처가 십자가 너머에 그가 바라보신 영광과 기쁨의 가치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믿음으로 그 영광을 바라보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요청에 따라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바라는 영광의 보증이 되게 하셨고(엡 1:14), 아들은 자기 몸에 남겨진 상처를 통해 우리에게 얼마나 그 영광 주시기를 원하셨는지 증명합니다.

3. 그리스도의 상처는 내가 닮아야 할 상처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나를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스스로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나와 영원히 자기의 것을 누리기 위하여 고난을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상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랑에 깊이 빠진 바울은 우리 역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고전 16:22).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기쁨으로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분을 위해 기쁨으로 고난을 맞이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목적이 없지 않습니다. 마냥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분이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합니다(딤후 1:12).

우리는 또한 외롭지 않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히 2:18).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 받으신 고난을 우리도 받기 원합니다(벧전 2:21).

죄를 그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벧전 4:1) 악행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벧전 4:15) 의를 위하여 고난받는 복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벧전 3:14).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기 원합니다(벧전 3:17). 그 가운데 우리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합니다(벧전 4:19). 그분이 우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벧전 5:10).

자식을 구한 어머니가 자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 알고 허랑방탕하게 삶을 허비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머니 얼굴에 난 상처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어머니처럼 타인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옳은 일을 행하며 심지어 목숨을 걸고 구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0-1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고난)을 몸에 짊어지는 삶을 삽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상처를 사랑하고 그 상처를 닮아가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생명 또한 우리 삶을 통해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겨지는 고난을 택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고난을 견디는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가 아닌 “너희”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망이 그분 안에 역사하심으로 그분을 통해 나타난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아버지의 생명을 나타낼 때 우리를 통해 내 가족, 이웃, 공동체, 국가,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당신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십시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당신이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벧전 4:13).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 8:1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한 하나님의 상속자라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롬 8:17).

존 파이퍼는 자신의 대표작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고난을 통해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리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함으로써 우리가 생명을 얻는 길인 십자가를 전할 때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보고 우리를 통해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기 원하신 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겪는 고난을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실재로 느낄 수 있게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하나님을 기뻐하라”, 생명의 말씀사, 2009, 354p)

우리는 언제까지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게 될까요? 그 상처를 기억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에 감사할까요?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아멘!

영원무궁토록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영광과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Grace to Korea의 자문 목회자이시며 고정 기고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The Master’s Seminsry에서 M.Div와 Th.M(신약전공) 과정을 마친 후, 현재 유평교회의 담임 목회자이며,  Master’s University에서 성경적 카운셀링의 대학원 과정을 마친 아내 김 선미 자매와 2008년 결혼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야고보서 강해’, “정직한 크리스챤의 질문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