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이 있을 때 겁내지 말라 (고전 1:3-4)

Young man with hands clasped together

고난을 잘 견디는 사람이 있다. 이를 악물고 잘 버티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다. 고난 중에 감사 제목을 찾는 사람도 드물게 있다. 비통하고 괴로운 일들 속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잘 찾아 부정적인 감정을 추스르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여간해서 보기 힘든 사람이 있는데 바로 고난 중에 찬송하는 사람이다.

“저, 힘들지만 잘 참고 있어요…”

“너무 눈물 나고 아프지만, 그 가운데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 때문에 힘이 나요…”

이런 고백은 가끔 들어볼 수 있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외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찬송하리로다!”

분명히 이 사람은 고난 중에 있다. 그는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넘치는 고난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 모든 환난 속에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찬양합시다!”(새번역)라고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자기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독려한다. 사도 바울 이야기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서 그는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찬송을 부른다. 모든 환난 중에서 시작된 이 찬송은 분명한 대상을 향한다. 바로 하나님이다. 어떻게 그는 고난 중에 찬송을 부를 수 있었을까? 그가 묘사하는 하나님을 간단히 살펴보면서 그 비결을 찾아보자.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바울은 먼저 찬양의 대상인 하나님과 찬양을 부르는 주체인 자신의(“우리”)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묘사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의 주님(큐리오스)이시다(롬 10:9).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롬 5:1).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롬 5:11).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끊이지 않고(롬 8:39),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역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다(고전 1:4). 무엇보다도 어둠 가운데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 우리에게 비쳤다(고후 4:6).

한 마디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온다(약 1:1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결된 우리는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신성과 능력과 영광과 은혜를 풍성히 누린다.

바로 이 이유로 바울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삶과 죽음의 이유가 되었다. 살든지 죽든지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을 원했고(빌 1:20), 죽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온전히 얻는 길이었기에 그가 열렬히 환영했던 일이었다(빌 1:2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했다(빌 1:11).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오히려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본 바울에게 모든 환난은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이라면 찬송할 일이었다. 이것은 맹목적인 믿음이나 광신도적인 집착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신령한 복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고 사모했기 때문이다(엡 1:3-14).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환난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복의 가치를 잊어버리게 한다. 복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눈을 가로막는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한다.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구한다(엡 1:18). 우리 눈이 밝아져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가 주신 부르심의 소망을 보고, 우리에게 주신 유업의 풍성한 영광을 깨달을 때 우리는 모든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다(엡 1:12).

건강을 잃을 수 있다. 자존심을 잃을 수 있다. 신체의 일부를 잃거나 가족을 잃을 수 있다. 심지어 생명을 내놓아야 할 수 있다. 아무리 혹독하고 모진 고난의 칼이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게서 도려내도 여전히 찬송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기 때문이다(엡 3:19). 환난이 나에게 모든 것을 가져가도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주시므로 우리는 모든 환난 속에서 그분을 영원히 찬양할 수 있다.

  1. 자비의 아버지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다. 구약의 백성에게 자기를 알리실 때 이미 그분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알리셨다(출 34:6). 모세 역시 하나님에 대해 “자비하신 하나님”이며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했다(신 4:31). 예수님 역시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눅 6:36). 아버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에 대해 긍휼과 자비를 꼽는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야고보 역시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라고 고백한다(약 5:11).

바울은 모든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잊지 않았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주신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롬 8:32). 힘에 겨운 고난으로 살 소망까지 끊어졌어도 그 상황에서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기억했다. 자기와 비교할 수 없는 고난과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신을 위해 당하셨음을,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확증하는 분명한 증거임을 바울은 알았다(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사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은 궁극적으로 죄의 결과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벽한 동산에서 고난은 존재하지 않았다. 악한 자 마귀와 그 세력, 우리의 죄, 다른 이의 죄, 죄로 타락한 세상… 하나님을 거절하고 떠난 결과로서 죄는 인간의 삶에 죽는 순간까지 달라붙어 고통을 가하는 무서운 저주를 불러일으킨다.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는 이들에게 죄의 결과물이 미치는 영향력은 더 크다. 빛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에게 어둠이 더 분명한 것처럼 말이다. 죄를 조장하는 마귀와 그 세력,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세상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미워한다(요 15:19).

하지만 그 모든 고통 속에서 바울은 기억했다. 죄의 모든 저주, 세상과 마귀, 사망과 음부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두 정복하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비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그 모든 고통의 근원에서 건져내셨다. 그러므로 현재 당하는 고난을 바라보는 바울의 시각은 이와 같았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는 모든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며 그래서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었다(롬 8:31).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롬 8:35). 그래서 그는 모든 환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었다(롬 8:37). 자비의 아버지를 믿었기 때문이다.

  1. 위로의 하나님

때로 힘겨운 일을 만난 성도를 만날 때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예전에 두 살 된 아이를 잃은 부부를 위로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위로가 될지 막막했다. 우리는 똑같이 제한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말도 별로 없다. 슬픔에 빠진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위로이지만, 그것도 내가 유사한 일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제한적이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건강한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내가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로자라고 묘사한다. 하나님만큼 우리를 이해하시는 분이 계실까? 그분은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신다(시 103:14). 우리를 지으신 그분만큼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은 없다.

하나님의 위로가 더 강력하게 전달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히 4:15).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그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중보하신다(딤전 2:5). 욥은 극심한 고난 중에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욥 16:19)

상상력을 동원하여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아버지, 저들의 고통을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았습니다. 이런 위로를 내려주소서. 저들의 눈을 열어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고, 상하고 어그러진 마음에 풍성한 위로를 더 하소서. 고통 너머의 기쁨을 알게 하시고,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에서 살면서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겪으셨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의 삶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다. 하지만 고난만 넘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는 위로도 넘친다(고후 1:5). 위로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우리에게 위로를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후 1:4). 그래서 찬양할 수 있다.

  1. 위로하게 하시는 이

지금까지 바울이 환난 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살펴봤다.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하신 이가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무궁한 영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우리는 어떤 고난 중에서도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양할 수 있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가 우리에게 내려오는 통로 역시 그리스도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셔서 우리를 모든 죄의 저주에서 끊으시고 자녀로 삼아주셨다. 모든 환난 속에서도 우리는 자비의 아버지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고 그분을 찬양할 수 있다.

모든 위로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우리에게 흘러넘친다. 고난이 넘친 것처럼 위로도 우리에게 넘친다. 고난은 이 세상에서 잠시 주어질 뿐이지만, 영광은 영원할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잠시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고난 중에 바울이 찬양했던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과 자신의 수직적 관계에서 멈추지 않고 수평적 관계까지 나아간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그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위로가 쓸모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그가 당하는 고난 중에 두신 분명한 뜻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받은 고난과 위로를 통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환난 속에 쉽게 오해한다. 이 고통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만 겪는 고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성도의 삶 가운데 그늘 없는 삶이 없다. 각자 짊어지기 힘겨운 무게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쉽게 말해 모두 크고 작은 환난 중에 있다. 모두가 위로가 필요하다.

바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맛보고 이로써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기 원했다. 자신이 당한 고난을 다른 이를 위로할 수 있는 근거로 사용했다. 고난 중에 경험한 하나님의 위로가 다른 이를 세워주고 격려하는 능력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를 위로하신 그대로 성도를 위로하기 원했다. 자비의 아버지께서 하시는 위로의 사역을 자기도 하기 원했던 것이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6)

상심한 자를 세워주는 것은 기쁜 일이다. 환난을 겪는 이가 참된 위로를 받고 그 고통을 견디는 것을 보는 것은 보람된 일이다. 내가 당하는 고난, 그 속에서 얻는 주님의 위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내가 의지하고 신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환난 속에서 내가 “찬양합시다!”라고 외칠 수 있다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내 형제자매가 함께 그 찬양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에게 할 수 있는 한 방향의 위로가 아니었다. 위로의 하나님은 디도를 통해 바울을 위로하셨다. 디도는 고린도 성도에게 받은 위로로 바울을 위로했다(고후 7:6-7).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 7:7).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다. 고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셔서 다른 성도를 능히 위로하게 하신다. 서로 사랑하게 하신다.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신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면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 13:11)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나누는 기쁨과 위로와 평안의 근원이 되신다. 모든 환난 중에서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 영광과 능력 안에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사랑과 평안을 서로 풍성히 나눔으로 서로 위로하고 기뻐하고 온전하게 되며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서로를 향해 “찬양합시다!”라고 외칠 수 있다.

환난이 있을 때 겁내지 말라. 하나님이 그만큼 가까이 계신다는 말이다. 고난이 임할 때 낙심하지 말라. 그보다 더 풍성한 위로를 주실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주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라. 그분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사랑을 믿어라.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얻은 위로를 통해 형제자매를 세워주라. 그리고 외치라.

“찬양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이 고난 중에서도 찬양받기 합당하신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The Master's Seminsry에서 M.Div와 Th.M(신약전공) 과정을 마친 후, 현재 유평교회의 담임 목회자입니다. Master's University에서 성경적 카운셀링의 대학원 과정을 마친 아내 김 선미 자매와 2008년 결혼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