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1): 율법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This entry is part 1 of 5 in the series 그리스도인의 자유

믿는 자들은 삶의 회색지대에서 어떻게 삶에 살아가야 할까? 삶 속에서 일어나는 활동들. 오락 등 그 무엇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분별해야 하나?

회색지대 그 자체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교회는 언제나 성경이 직접 언급하지 않은 사회적 문제, 대중적 유행, 그리고 개인적 행위들을 대해 왔다. 춤, 술, 그리고 담배 등은 고전적인 예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지 않는 일과 활동에 대한 선택으로 가득 차 있다.

전형적으로, 많은 믿는 사람들은 삶의 회색지대에 대해 두 가지의 극단적인 반응을 한다.

율법주의

어떤 사람들은 법칙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따르기를 기대하면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라는 긴 목록으로 지배된, 엄격하게 규제된 금욕주의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율법주의적 구조는 믿는 자의 삶을 기초적인 순응 즉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영성과 같다고 축소 시킨다. 이런 지나치게 단순화된, 흑백논리로 삶에 접근하는 것에는 개인적 믿음과 성령 충만한 삶의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율법주의자들은 필연적으로 누가복음 18장 11~12절 그리스도의 비유에 나타난 바리새인의 기도에 드러난 정신을 보여준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드리나이다 하고”

어떤 사람들은 법칙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도 따르기를 기대하면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라는 긴 목록으로 지배된, 엄격하게 규제된 금욕주의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율법주의적 구조는 믿는 자의 삶을 기초적인 순응 즉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영성과 같다고 축소 시킨다. 이런 지나치게 단순화된, 흑백논리로 삶에 접근하는 것에는 개인적 믿음과 성령 충만한 삶의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율법주의자들은 필연적으로 누가복음 18장 11~12절 그리스도의 비유에 나타난 바리새인의 기도에 드러난 정신을 보여준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의로움과 참된 영적 성숙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기록했듯이,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이다(갈 3:21). 율법주의는 성령의 일을 강탈하고, 양심을 질러가 선에 대한 잘못된 기준을 인위적으로 세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희생시키고, 그 자유로 말미암아 자라고 성숙할 기회를 희생시킨다. 오히려, 이것은 공허한 종교성과 바리새인적 교만한 위선을 부추긴다.

율법주의자들은 그들의 규칙과 지침이 죄의 영향을 받지 않게 자신들을 묶어두었다고 믿는다. 그들은 분리주의와 엄격한 기준을 통하여 거룩함을 강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바리새인적 자기기만은, 더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신성 모독적인 반역과 같게 영적으로 치명적이다.

자유주의

symbol; god; freedom; philadelphia; constitution; pennsylvania; crack

율법주의와 반대로 또 다른 극단인 자유주의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율법주의와 반대의 이유로 위험하다. 그들은 엄격한 규칙의 끝없는 목록에 순종하기보다, 교회의 많은 사람은 반대쪽 길로 가버렸다. 그들의 자유를 그 최대치까지 탐험하고 경험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모든 종류의 행동, 활동, 그리고 목표를 따라가는 데에 일종의 면허로 사용한다. 아무 제동 없이, 그들은 모든 경계를 밀어버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세상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즐긴다.

사실, 어떤 것이 성경에 엄격하게 금지된 경우만 제외하면, 그들은 그것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부추긴다. 자유를 거들먹거리며, 그들은 그들이 듣고,보고,읽는 것에 대하여, 가는 곳에 대해, 그들이 구매한 것에 대해, 그들이 마시고 피우는 것에 대해, 그들이 몸에 문신한 것에 대해, 또는 그리스도 안의 자유를 표현하고 즐긴다며 행하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라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신이 왜 자신들과 같은 일을 하지 않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정신은 오늘날 교회에 만연해 있다. 그리고 그 정신의 재앙적인 결과는 너무나 분명하다. 자신이 믿는다고 고백한 수많은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희생하고, 세속을 추구하는 노예가 되었다. 그 증거는 모순되게도 자신들의 행위로 더러워졌다. 그리고 주님과 그의 교회를 위한 그들의 가치는 세상을 향한 사랑에 의해 불구화되었다. 명백히, 이러한 종류의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유혹, 타락, 그리고 궁극적으로, 도덕적 파선을 향한 초대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극단은 (율법주의와 자유주의) 치명적으로 일그러진 우선순위와 관점으로 이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을 격리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모든 회색 이슈들을 고정된 흑백 틀에 고정하려 고 한다. 그들에게 그들의 정해 놓은 규칙의 요새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은, 믿는 사람들도 포함하여, 모두 제멋대로 행동하는 죄인들로 간주한다. 반대로, 세속적인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양심을 불태우고, 심지어 예전엔 선명했던 성경적 경계를 더 인식 불가능해지게 할 때까지 모든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 버린다. 그곳에는 그들이 보이는 삶의 예시가 어떤 것인지, 혹은 그런 그들의 삶의 모습이 불러올 유혹들이 어떨 것인지, 또는 어떤 가르침이라도 그것이 교훈적 온건에 대한 것이라면 율법주의라고 깎아내리는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 이런 두 세계관이(율법주의와 자유주의), 서로 더는 다를 수 없을 만큼 다르지만, 사실 그들은 한 동전의 양면과 같이 같다. 두 쪽 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에 대해 믿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오염시킬 똑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자유는 두려워 할 것이 아니며, 우리가 선택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면허도 아니다. 그리스도 안의 자유는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로서, 종종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근거로서 기능한다. 그리스도 안의 자유는 우리의 신앙이 시험받고, 힘을 얻고, 정제되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유를 어떻게 적절히 사용해야 하고, 즐겨야 하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다가오는 2주 동안을 ‘우리의 자유에 대한 성경에서 말하는 제한’이라는 주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존 맥아더 목사는 고린도전서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주의 깊게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가 가지는 자유가 영적으로 어떻게 유익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 시리즈는 당신이 놓치기 원치 않을, 도움과 실용성을 주는 시리즈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2): 자유의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