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오용되는 성경구절: 사회복음이 과연 완전한 복음인가?

poor man collects alms from a few Euros in his g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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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마태복음  25:34-46; 야고보서 1:27

Code: B151009

당신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기적으로 목욕해라, 만일 필요하다면, 물을 쓰도록 해.”

또한, 당신의 친구에게도 이렇게 조언하지 않을 것이다.

“신실한 남편이 되어라, 만일 필요하다면 아내를 사랑해야 해.”

이러한 불필요한 설명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것 말고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라. “살아 숨 쉬세요, 만일 필요하면 산소를 들이키고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복음 전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와 비슷한, 논리적이지 않은 말들을 주고받는다. “복음을 전하세요, 만일 필요하다면 성경 말씀을 사용하시고요.” 이것은 사회복음(Social Gospel)주의자들이 아주 많이 즐겨 사용하는 주문과도 같은 어구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가 말했다고 잘못 여겨지고 있는 이 인용구는 열성적인 복음주의자들을 깨우고, 사회운동을 복음 전도의 한 형태로 잘못 정의하려고 할 때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사회복음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릭 워렌(Rick Warren) 목사와 짐 왈리스(Jim Wallis) 목사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현실을 직시해 보자. 나의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드러낸다는 이런 주장에 어느 정도 우리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전도자들을 보면서 정형화된 비난을 쏟아내는 것도 현실이다. 물론 열매가 없는 믿음, 즉 위선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또한 그분의 백성들 앞에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약 2:14-17). 하지만 또한 정확하고 분명한 복음의 전달 없이 선한 열매, 선한 삶만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모순적인 일이다.

말씀의 필요성

바울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볼 수 있으리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신약성경에서 “전파하다(preach)”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마다 그 단어는 항상 아주 활발하게 말로 전달하는 선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역사는 간증하는 말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계속해서 범하는 율법을 완성하신 분(마 5:17-18, 롬 3:23),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견디신 분(사 53:4-6, 벧전 2:24), 그리고 죽음을 이기신 분(딤후 1:10, 히2:14).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그들을 대신해서 행하신 그분의 놀랍고 특별한 사역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고후 5:21), 단순히 우리의 삶이나 행동만으로 그 모든 것들을 증명하기란 불가능이다. 보디 바우캄(Voddie Baucham) 목사가 말하길, “내가 복음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를 그리스도의 자리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입히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과 같은 사회 정의의 일들은 무엇인가? 아무도 이런 일들이 나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야고보서에서도 이런 선행은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약 1:27). 하지만 이런 선생들과 자비의 행위들이 한 사람의 구원에 기여할 수가 있는가?

사회복음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고 대답하며 마태복음 25장을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절로 사용한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리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34-46).

예수님께서 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과연 우리의 영원의 운명이 주린 자의 배를 채워주고, 집 없는 자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억압받는 자를 돌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과의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2:8-9).

 순전한 [다른] 복음The Whole [Other] Gospel

토니 캄폴로(Tony Campolo)는 사회복음을 옹호하는 아주 저명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마태복음 25장 해석은 이 사회복음 운동을 대표하는 격이다. 토니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복음을 분명하게 부정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영원의 운명은 우리가 어떻게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에게 대하는지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특별히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심판의 날 우리에게 주어질 질문은 바로 우리 각자가 이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어떻게 반응했나 하는 것이다.”

토니가 설립하여 대표로 있었지만 최근에 문을 닫은 EAPE(교육의 증진을 위한 복음적 지원)라는 단체에서는 토니가 “이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분명히 정의한다.

 예수님은 집이 없으셨고 우리는 예수님을 “지극히 작은 자”로 만날지도 모른다. 바로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과부이며, 나그네이고 억압받는 자들이 바로 토니가 말하는 완전한 복음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EAPE의 거룩한 사역은 이 완전한 복음이 바탕이다. 그리고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던져준다: 집 없는 노숙자들이나 이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캄폴로가 사용한 “순전한 복음”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자. 그가 암시하는 것은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단지 복음의 일부분이며 소위 “완전한 복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구제 운동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불균형적인 이런 주장은 마태복음 25장 35-40절에 대한 그의 그릇된 판단을 보여준다.

성경은 계속해서 선한 행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 일들은 구원의 자연스러운 열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로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참고. 에스겔 26:25-27, 약 2:14-17).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에서 여러분은 각자의 행위에 따른 심판을 볼 수 없다. 여러분이 마태복음 25장에서 보는 것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믿음이 나타내는 선한 행위이다. 존 맥아더는 바로 이점을 강조한다:

 “마태복음 25장 35-36절에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선한 행동은 구원의 열매이지, 구원의 뿌리가 아니다. 이런 열매가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는데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행위들이 구원의 징후인지 아닌지 한에서만 그 행위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미 미리 주권적으로 정해 놓으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원자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이름으로 행해진 어떤 선행에 대해서도 영적인 축복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심판받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는 예수님께서 구분하신 이 두 그룹이 교회와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이 두 그룹은 바로 진짜와 가짜 그리스도인들이다. 교회 밖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은 공공연히 하나님을 부정하고 불신앙의 삶을 사는 반면, 가짜 그리스도인들은 진짜 그리스도인인 척을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 무리 사이에 끼어있다. 하지만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을 자들이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0-23)

마태복은 25:34-46절은 마태복음 7장과 비슷하게 그들의 열매와 행위의 증거들에 따라 참과 거짓 신자들을 구분한다.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이 두 본문에서 나오는 그룹들 모두 자신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마 25:37, 44). 두 그룹 모두 그들에게 내려진 판결에 놀란다. 그들의 놀람은 한편으로는 참 그리스도 백성의 겸손함을 나타내며(“우리가 언제…하였나이까” 마 25:37,39), 또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의를 드러낸다 (“우리가 언제…아니하더이까” 마 25:44).

낮은 자가 누구 인가?

마지막으로, 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선한 행위의 수혜자들은 캄폴로가 주장하듯, 이 세상의 권리를 잃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형제”(마 25:40)라는 단어는 이 자비가 어디로 향하는지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진정한 믿음의 열매는 우리가 어떻게 고난받는 형제 그리스도인들 돌보는가를 통해 증명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참고. 요 13:35, 요일 3:10-11). 존 맥아더가 말하길:

 “우리의 왕께서 이 자들을 내 형제라고 가리키신 것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정체성 때문에 그들을 종종 편안한 안식처나 의복 없이 굶주리고 목마를 것이며, 병들고, 옥에 갇히고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이다.”

 결론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권리를 잃은 자들이나 힘없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조금이라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복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접근했다면 그들은 마태복음 25장 아닌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본문을 가지고 본인들의 주장을 펼쳤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들 말이다(마 22:39, 5:44). 마태복음 25장의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옹호하는 사회복음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25:34-46절은 결코 사회적인 운동 같은 일들을 통한 구원의 청사진을 제시하기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우리의 행위만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진실성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은 분명히 고통받는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형제 자매 그리스도인들을 돌보기 바란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돌봄이 부족하다는 것은 구원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그리고 말씀으로 복음을 전파하라. 왜냐하면 언제나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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