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가르침에서 문제를 발견할 때 기뻐하지 말라

abstract justice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1~12)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모든 진리의 기준이 되는 성경을 바르게 알아 과연 성경이 그러한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용에 있어서 좋은 가르침은 얼마나 성경이 담고 있는 내용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담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각종 설교, 강의, 책, 칼럼, 기사 등 모든 정보는 성경을 기준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들, 특히 선생, 설교자, 목사, 신학생 등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죄의 문제를 다루기 원합니다. 이것은 저 스스로에게도 항상 도전이 되는 부분입니다.

  1. 형제들이여, 우리는 판단의 대상이 누구인지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우리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 배를 불리려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만 판단하지 않습니다(벧후 2:1). 우리는 같은 태도를 가지고 형제를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가 피를 흘려 사신 형제가 아닙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그 형제 안에서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빚어가고 계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하신다면 우리가 어찌 그 형제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 형제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영의 양식을 먹이고 계신다면 어찌 우리가 그 형제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안목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가르침에 한계가 있고, 오류가 생길 수 있으며, 잘못 전달하거나, 심지어 틀린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형제에게 잘못된 부분에 대해 온유하고 겸손하게 묻고 그것을 스스로 고칠 수 있도록 권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판단하다”(katalaleo)라는 동사는 “~을 대항하여 말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거기에 태도나 의도의 문제가 담겨 있는데, 바로 판단의 대상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의 가르침을 교정하고 형제와 형제의 가르침을 듣는 이들의 덕을 세워주려는 목적보다는 형제를 대항하여 말하기 위한 목적과 태도가 드러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형제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형제의 가르침을 듣는 이들을 위한 것으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주의 영광을 위한 순수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형제를 대항하여 말하려고 하는 마음속 깊은 의도나 함께 섞여 나오는 태도가 있지 않은지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주 영광이 아닌 나의 영광을 높이려는 불순물 같은 생각이 들어있지 않은 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판단”한다면,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형제가 자신의 가르침에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로 잡으며 더 성장하여 주의 귀한 일꾼으로 일하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성급하게 먼저 내가 아는 성경 지식을 가져다가 형제의 가르침을 재단하고 잘라내기 바쁩니다.

우리가 “판단”한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판단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인내하시면서 형제가 연약함을 극복하도록 믿고 사용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조금만 형제가 잘못 가르치면 일꾼으로서 탈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눈에 난 형제는 가르치는 말 한마디 한마디 책잡고 문제로 삼으려고 합니다. 같은 기준을 나의 가르침에 적용한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판단”한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형제를 위하지 않습니다. 형제의 가르침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발견되면 그 부분을 위해 안타까워하면서 도와주려는 마음보다는, 내가 그 형제가 몰랐던 잘못을 발견했고, 나는 그 형제보다 더 잘 안다는 교만한 마음과 형제에 대해 비웃음이 흘러나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아주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바울을 괴롭게 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의 마음을 더 상심하게 만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제가 바울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법합니다.

“저렇게 예수를 증거하면 뭘해, 동기가 저렇게 불순한데…”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2:18)

바울은 그 형제 중 “겉치레”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결국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나에 대한 불순한 태도를 가진 형제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바울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보인 태도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바울은 복음 자체를 부정하는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에는 분노했습니다(갈 1:6-9).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이해를 교정할 때 그의 목소리는 훨씬 부드럽습니다. 고린도교회 쓴 편지를 보면 바울은 그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가르치는 은사를 풍성하게 사용하고 있던 그들을 사랑과 온유와 겸손으로 하나하나 다루고 권면하고 세워줍니다. 문제를 “대항하여 말하되” 형제를 대항하여 말하지 않는 모습, 그 모습이 우리의 분별에 확연히 드러나야 합니다.

성경은 날카롭고 예리한 양날 검과 같습니다(히 4:12). 모든 사람의 가르침은 성경을 통해 더 예리하게 분석되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지 가르침의 내용만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을 분석하는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도 성경은 날카롭고 예리하게 판단합니다.

가끔 설교나 책을 비판하는 글을 읽을 때마다 혹은 그런 비평의 글을 써야 할 때, 하나님이 내가 품고 있는 이 마음을 기뻐하실까? 생각해봅니다. 나는 형제를 세우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형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인가? 거룩하고 정결한 성경의 진리 앞에서 내 마음은 깨끗한가? 비춰봅니다. 내가 하는 비평이 혹시 형제보다 내가 더 많이 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은 아닌지, 그런 태도가 섞여 나와 비평의 글이나 말이 선한 열매가 아닌 악한 열매를 더 많이 맺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같은 칼을 쓰더라도 환자에게 사용하는 것과 적군에게 사용하는 것은 달라야 합니다. 대상에 따라 목적도, 강도도, 태도도, 사용하는 방식도 다 달라집니다. 말씀을 가지고 올바른 분별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 대상이 형제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의도적으로 성도를 무너뜨리려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로 성도에게 손해를 끼친 형제입니다. 영적 양식에 독을 풀어 해로움을 끼치려는 사람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영적 양식을 준비했지만, 아직 능숙하지 못한 형제입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가지고 성도를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 성실하고 겸손한 삶을 가지고 성도를 도우려는, 그러나 내용을 준비하는 데 미흡한 점이 있는 형제입니다. 그 명백한 대상의 차이와 관계없이 칼을 쓰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율법이 우리가 하는 판단의 저변에 확실히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은 바로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요 15:12). 그리스도가 우리의 잘못된 가르침을 교정해주시듯, 우리의 실수를 오래 참으시듯, 우리의 오류를 사랑으로 인내하며 옳은 길로 인도해주시듯,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분별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풍성히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1. 형제들이여, 우리는 판단자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가끔 우리는 정의감에 불타오릅니다. 내가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재판관처럼 형제의 잘못을 누군가가 분명하게 바로 잡아주고 그 잘못에 대한 판결을 내려줘야 하는데, 그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듣고 혼란을 느낄 때 바로 내가 그것을 분명히 지적하여 길을 바로잡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서야 잘못된 가르침이 교정되고 그에 대한 피해를 복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못된 가르침을 전달한 사람을 대항하여 쓴소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적임자는 바로 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바로 구원의 능력과 심판의 능력 모두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야고보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라”고 말하였습니다(약 3:1). 누가 심판을 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분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닙니다. 양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끌고 간 책임은 양의 주인인 목자장이 추궁하실 것입니다(벧전 5:4).

물론 객관적이고 성경적인 기준을 가지고 가르침을 분별하고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재판관의 입장에서 하는 것과 그 재판관 앞에서 똑같이 법에 따라 심판받아야 할 사람으로서 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야고보는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묻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나도 누군가의 이웃에 불과합니다. 내 이웃이 입법자나 재판관이 아닌것처럼 나도 입법자나 재판관이 아닙니다.

재판관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은 실질적으로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요?

나는 같은 형제로서, 재판관 앞에 설 사람으로서 형제에게 옳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됩니다. 올림픽 심판처럼 경기에서 실수한 선수에게 “실격”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그 경기에 참여한 팀원처럼 그렇게 하면 실격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그렇게 전하는 건 아니라고 판정을 내리기보다는, 말씀을 그렇게 전하면 양들에게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오늘 전한 말씀 속에 이 내용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고 판결을 내리기보다는, 그 부분을 더 분명하게 전하면 설교자로서 하나님 앞에 성실한 일꾼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판정 내리기를 좋아합니다. 너무 자유주의 신학 사상이 많은 사람이다. 너무 감정적으로 말씀을 전한다. 성경을 하나하나 다 설명하지 않고 넘어간다. 너무 메마르게 전달한다. 성령에 관한 언급이 너무 많다. 성령에 관한 언급이 너무 적다. 이런 면에서 틀렸고 저런 면에서 잘못됐다. 마치 심판처럼, 재판관처럼 판단 내리는 일이 자기 일인 것처럼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하실 것입니다. 재판관의 판단 기준인 성경을 바르게 분별하여 내 형제보다 더 분명한 기준을 알고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기준으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을 자세히 설명해주어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그 기준에 이를 수 있도록 권면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부분에 있어서 내가 재판관이 아니라는 것의 의미입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같은 형제가 말씀을 전달하는 일에 실패할 때,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담는 일에 실수할 때, 그 부족함과 연약함이 드러날 때 손뼉을 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소해 하고 은근히 좋아하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냉정하게 판단의 칼날을 들이대고, 금을 긋고, 잘못된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나는 그와 같지 않다고 으스대고, 그 잘못을 내가 발견했다고 으쓱대서는 안 됩니다. 형제의 부족함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귓속말로 이야기하고, 상대적인 우월감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고 재판관 앞에 설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가르침에 대해 결산하고 심판받게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모두 드러나고 부족한 부분이 공개될 때 우리는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그런 부족함을 같이 가지고 있는 자로서 형제의 가르침을 매몰차게 비판한 마음마저 낱낱이 벗겨져 밝혀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저처럼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또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힘쓰고 애써서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헌신과 열정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그것을 말과 글로 전달하는 수고를 다 하고 나서도 이 부분 때문에 하나님 앞에 큰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판단자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웃의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지만 절대 판단자의 자리에서 판결을 내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권위와 지혜가 넘치는 가르침으로 백성을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 되십니다. 그분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자기 전통과 율법을 뒤섞어 잘못 가르치는 이들을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상종하지 못할 자들로 꼬리표를 붙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가르침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져가며 틀렸다고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명히 가르쳐주셨지만 동시에 온유함을 입으시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과 죄악 된 태도를 지적하셨지만 동시에 그 죄와 허물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를 절대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 자들에게 오히려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은혜와 용납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에게 모든 심판의 권한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셨지만, 그분은 만민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의 분별이 그리스도를 닮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성경에 근거한 분별, 객관적이고 예리한 분별, 죄에 대한 확실한 지적, 잘못된 교리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 그리스도의 놀라운 판단과 지혜를 본받기 원합니다. 동시에 죄인에 대한 이해, 그 연약함에 대한 동정, 잘못된 것에 대한 긍휼과 자비, 무관심과 반항의 마음에 대한 사랑이 담긴 훈계, 회개를 부르는 간절한 가르침, 그리스도의 한없는 은혜를 배우기 원합니다.

우리의 분별에 진실한 사랑, 곧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이 흘러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자라 가야 할 부분은 단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를 원합니다(벧후 3:18).

The Master's Seminsry에서 M.Div와 Th.M(신약전공) 과정을 마친 후, 현재 유평교회의 담임 목회자입니다. Master's University에서 성경적 카운셀링의 대학원 과정을 마친 아내 김 선미 자매와 2008년 결혼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