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vs 진화(50) : 요약과 결론 2

과학은 관찰 가능한 것과 반복이 예상되는 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에 관해 답하는 것은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과학적인 방법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우주의 기원 혹은 이에 수반되는 기적들과 같이 반복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 없다. 진화론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때로 이성적인 과학자들이라기보다 종교적인 신봉자들처럼 행동한다.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가설을 신앙처럼 믿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진화론적 출발점을 온전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여기 몇 가지 예가 있다.

ㆍ 자연발생은 불가능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無)에서 생길 수 없다.

ㆍ 생물학자들은DNA에서 발견하는

모든 정보를 설명할 수 있다.

ㆍ 동일과정 지질학은 공신력이 없고 증명되지 않은 가정을 연대측정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전지구적인 대홍수 격변에 대한

성경기록을 비이성적으로 적대시 한다.

모든 연구영역에서 진화론자들은 수없이 많은 가정을 내세우면서도 마치 그것들이 추호도 의심의여지가 없는 확실하게 증명된 과학적 사실인 것처럼 생각한다. 사실, 과학적인 결론이라는 것이 여전히 움직이는 목표물과 같은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칭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 – 실상 대부분의 기독교 기관들 – 이 세상 사람이 믿고 따르는 진화론적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 중많은 사람들은 학문적인 명망 때문에 기꺼이 성경의 진리를 희생시키려 한다.

성경의 창조 기사 속에 수 십 억년의 세월을 끼워 넣는 일은, 성경과 진화론을 양립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성경 본문을 왜곡하며, 성경의 무오성을 타협하고, 나아가 복음을 훼손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유신론적 진화론과 구조가설, 이 두 가지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배타적인 견해를억지로 화해시키려는 파멸적인 시도에 불과하다. 문자적으로 존재했던 아담과 이브의 존재 이전에도 문자적으로 죽음이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창조기사의 역사성을 확증했던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바울, 그리고 다른 신약의 기자(記者)들과 반대 입장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은그분의 지혜로 구속사의 모든 측면을 살아있는 역사로 엮으셔서 그분의 말씀 속에 기록해 두셨다.우리는 그 말씀 속에 있는 창조기사와 아담과 이브의 특별한 창조, 또한 인류의 타락에 관한 기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하는가의 측정기준이 된다..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21:30)

세속적 인본주의, 물질주의, 자연주의 같은 세상의 주류 철학들은 가장 과학적인 연구와 그에 따른 결론들을 진화론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편향적으로 이용한다. 진화론은 교회에 최대의 위협이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주제이다. 존 맥아더는 마스터 칼리지와 신학 대학원 그리고 그레이스 투유의 운영진들과 함께 이러한 진화론의 거센 도전에 지금까지 성경의 진리로 굳게 맞서 왔다.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이 옳다고 여길지라도(잠 14:12; 16:25)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기 위하여 그분의 말씀을 굳게 붙들면서 우리의 관찰에 따른 몇 가지 내용을 결론적으로 제시하고 싶다.

궁극적인 권위의 문제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권위의 본질은 다른 누구에 의해 옳다고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권위는 자신의 행동과 판단에 대해 답해야 할, 자신 위에 또 다른 어떤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권위라고 할 수 없다. 내가 만약 당신에게, “어마어마한 폭풍이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오고 있어요.” 라고 말한다면, 나는 기상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내 말을 의심하여 그 정보의 출처를 요구할 수 있다. 나는 당신에게 지역 기상 캐스터에게 확인해보라고 말할 수 있고, 당신은 그들에게 그러한 예보가 올바른 것인지 확인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의 지역 기상예보가 우리 지역의 기상예보와 같이 폭풍을 예보하고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지역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등 조치를 취하기 전에 나 외에 지역 기상예보자 혹은 또 그 이상의 믿을만한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 더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지금 여기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의 답을 찾아보려는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다윈의 철학은 이런 대답, 힌두 철학은 저런 대답, 기독교 철학은 또 다른 대답 그리고 여타 다른 수많은 대답들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물어야 질문은 “누구의 말인가?” 이다.

진화론자들에게 있어서 시간, 우연, 그리고 진보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들인데 그들은 “바닥도 없고 수평선도 없는 끝이 없는 사실의 대양(Cornelius Van Til, 80)을 자주 언급한다. 하지만 그것은 늘 가변적이고, 여태까지 그래왔으며, 심지어 스스로 모순되는 것들이어서 그들의 궁극적인 권위는 정확히 설명하기가 힘들다. 히브리서 6:13 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라고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궁극적이고, 변함이 없으시며, 스스로 옳다 인정함을 받는 권위이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궁극적인 권위이시며, 그분의 말씀만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진리의 원천임을 잘 알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일관성 없이 행동하며 특히 진화론과 관련해서 그러하다.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주의(ism)’은 너무 커서 넘을 수 없는 장벽과 같다. 하지만 그들이 누리는 영예는 성경의 하나님과 비교해 본다면 곧 쇠하여 힘없이 무너져 내리게 될 건물과 같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스스로 옳다 인정함을 받는 분이시며 유일한 초월적인 권위이심을 믿는다면(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무오하며, 충분하다고 믿는다면(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매우 많으며, 심지어 자신들의 오류와 악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해왔다.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을 다룰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기 때문에 차후에 블로그 주제로 따로 만들어 다루도록 하겠다. 다만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유일하고 일관성 있는 접근방식은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방식이라는 점을 우선 명백히 하고자 한다. 우리는 문맥 속에서 정확하게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 문법(어휘와 구문론 연구)과 역사적 사실(문화와 시대적 배경 연구)의 원칙을 사용해야 한다.

문법적 역사적 성경해석 방법을 창세기에 적용할 때 당신은 문자적인 6일 창조, 문자적인 아담과 이브, 문자적인 타락, 전지구적인 홍수 그리고 지질학적인 기록에 근거를 둔 젊은 지구와 같이 진화론과 다른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해석방법을 따른다면 시작하기도 전에 결론을 미리 정해놓을 수 있는 수많은 이유를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이며, 당신은 바이오로고스에서 읽어볼 수 있는 그릇된 주장들에 쉽게 동조하게 될 것이다.

과학적 방법과 젊은 지구 창조론

젊은 지구 창조주의자들은 두려움에 맞서는 자들이다. 그들은 과학계로부터 조롱과 무시를 당하고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의 구직 기회를 놓치며 연구비 지원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연구가 기본적으로 과학적 추정에 근거를 두지 않고 “종교적” 색채를 지니고 출발한다는 편견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매우 불평등한 일이다.

나는 과학자는 아니지만 내가 기억하는 과학적인 방법(인터넷을 통해 약간 얻은 정보를 포함하여) 은 이런 것들이다. (1) 관찰, (2) 질문, (3) 가정 (4) 가정에 대한 점검, (5) 가정의 수용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자료분석, 그리고 (6) 가정의 수용 또는 변경 그리고 점검의 반복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이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를 하면서도 성경의 교훈의 범위를 넘어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들 역시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되 자신들이 정한 물질주의, 자연주의, 세속적 인본주의에 기초한 범위를 벗어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세상의 견해에 기초한 규칙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는가?

증거주의 변증론의 오류

 

그레이스 투 유, 필 존슨, 그리고 바이오로고스의 블로그에 달리는 많은 댓글을 살펴보면서 나는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들이 대부분 불신 세상, 특히 과학계에서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과학자로서의 명성도 아울러 유지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진화론의 모델에 따라 연구 활동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포용력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고, 영혼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자세는 겉으로 보기에는 바람직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지나친 단순함(이런 표현을 이해해주길 바란다)으로 비추어질 수 있으므로 차제에 몇 가지 조언을 하고 싶다. 당신이 만약 형이상적인 문제(예를 들어 근원의 문제)에 관한 판단을 내리려고 할 때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보다 인간의 이성을 최종적인 권위로 우위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당연히 피조물이 가진 한계(예를 들어 시간, 공간, 유한한 능력 등)를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죄에 영향력 아래 있는 인간은 지성적인 사고 능력에 제한을 받고 있으므로 인간의 이성은 객관적이 될 수 없다. 죄의 본성을 타고난 인간은 경건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에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정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더욱이 변증론적인 본문의 고전적인 구절인 베드로전서 3:15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런 상태에서 “너희 속에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 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주시라면 그분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 최상의 권위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예수님의 죽으심, 장사되심과 부활 및 성경의 다른 주요 진리들을 성경의 교훈대로 지키고 있는 해석학은 창세기 1장과 2장을 해석할 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해석방법이다. 젊은 지구 창조론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옹호한다. 우리는 진화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진리를 타협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진화론자들을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는 것이 최상의 정책이다. 다시 말해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며 잠언 26:4-5 말씀대로 실천하라.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첫째로,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는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진화론자의 어리석은 생각과 같은 생각을 품지 말고, 그들이 세운 가정을 받아들이지 말며, 그들의 추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이오로고스의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필 존슨이 이 문제와 관련해서 쓴 훌륭한 칼럼을 읽어보기 바란다.

둘째로,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는 부분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자료를 부정하지 말고, 그들의 결론이 외견상 정당성이 있어 보인다는 점도 부인하지 말라. 아마도 그것으로부터 무언가 배울 수 있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1) 추정과 가정의 오류를 증명하고, (2) 창조론자들이 그 증거에 대답할 수 있도록(비록 그 대답이 회의론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라. 요점은 불신자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들이 적어도 핑계치 못하도록(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다. 젊은 지구 창조론자로서 과학자로서의 길을 가는 것은 외롭고 힘든(특히 예산 지원이 없기 때문에) 일이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타협의 진짜 이유

 

흥미롭게도 우리가 진화론과의 복음의 타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 수많은 반박의 글이 올라왔다. 진화론의 위협에 대해서는 이견이 거의 없었다. 또한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에 답을 하는 데 있어서의 과학의 한계 대해서도 이견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존 맥아더 목사가 창세기의 문자적인 해석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모순과 타협을 드러내자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나타내거나 심지어 조롱하는 경우가 많았다.

해석학이라는 주제는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인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우리는, 전에 언급한 대로, 이 주제를 따로 다룰 예정이다. 여러 형태로 반대 의견을 표시한 댓글들도 나름대로 유익한 내용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들을 조롱하는 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글, 그리고 관념적인 글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보았다.

조롱성의 반박의 댓글은 주로 관련 분야에서 수 십 년간 경륜이 있는 박사들로서 학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식당에 들어와 테이블을 뒤집어엎고 소란을 피우며 손님들을 겁주는 서부시대 청부살인 총잡이처럼 잘난체하고 건방진 태도로 글을 남겼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주의를 끄는 효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일단 상황이 진정된 후에는 누구에게나 성경적인 일관성, 성실성이 극히 결여된 모습을 드러냈다.

포스트모던적인 글들은 배우려는 듯한 자세로 외관상 신사적인 모습으로 접근했다. 그들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쟁점이 되는 사항들에 건설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했다. 그들은 젊은 지구 창조론 형제들로부터 무언가 배우고자 하는 것 같았지만 끝내 자신들이 대학에서 배운 진화론적인 증거의 질긴 끈을 끊지 못했다. 우리는 온건하지만 피상적인 수준의 동의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생각의 저변에는 불신앙적인 가정과 성경적인 면에서의 모순이 단단한 바위처럼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일 그들이 성경을 대할 때 자신의 전공분야를 연구할 때만큼 진지하게 탐구하는 자세로 임했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관념적인 비평은 가장 다루기 힘든 종류의 비평이었다. 그들은 그저 관망하는 자세를 보이고 진지하지 못하며 경솔한 사람들이었다. 항상 회의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그것에 대해서 더 나은 대답은 고사하고 그들 자신의 견해가 진정 무엇인지조차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한 말씀이 가리키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것은 지역교회에서라면 모를까 온라인 블로그 상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한 가지 꼭 첨언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본질을 결정하는 질문은 바로 당신은 성경을 진실로 믿는가 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 진화와 창조라는 제목으로 다룬 여러 주제들에 관하여 우리와 더 토론하기를 원한다면 언제나 환영하지만, 우리는 우선 이 블로그 시리즈가 여러분 개인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듣고 싶다. 지금까지 우리가 올린 글을 읽으면서 진지하게 질문과 자신의 견해를 표현해준 모든 독자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여러분은 정말 훌륭한 독자들이었다. 조만간 새로운 시리즈로 다시 여러분과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그레이스 투 유의 트레비스 알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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