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vs 진화(25): 창세기와 자연주의의 인지적 부조화 (認知的不調和)

This entry is part 25 of 52 in the series 창조 vs.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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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아마도 부조화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보통 음악가들이 소리 사이에서 불협화음이나 불일치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견해와 신념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유사한 불일치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 인지적 부조화(認知的不調和)라는 다른 말이 있다. 인지적 부조화라는 말은 창세기에 기록된 우주의 기원에 대한 논쟁을 바라보는 좋은 방식일 것이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창조의 기록은 우리에게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이 본문 어느 곳에도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으로 무에서 우주가 존재하도록 하셨는지에 대한 충실하고, 글자 그대로이며, 역사에 기반을 둔 설명 외에 다른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창세기를 문자적 해석하는 이런 접근은 모든 상징적이고 시적이고 비유적이고 신화적인 해석들이 본문을 무리하게 해석한 부적당한 견해들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래에 설명하는 것과 같이 이것은 아무 대가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성경 본문의 어떤 정직한 해석도 창세기의 이 장들과 진화론 혹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 다른 어떤 “과학적인” 이론과 조화될 수 없다. 이 구절들의 핵심은 한 마디로 자연주의의 견해와 조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존 맥아더 목사가 그의 책 ‘Battle for the Beginning’에서 창세기와 자연주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

인류가 21세기를 통해 나아가면서 무서운 전망이 다가오고 있다. 교회는 성경이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들을 방어할 의지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교회 안의 많은 사람이 창조에 대한 성경 말씀의 문자적인 진리를 단정해서 말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거나 난처해 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 말씀과 자연주의자들의 최신 이론을 조화시키는 것이 가능하고, 심지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권위가 있는 듯한 목소리들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물론 신학적 진보주의자들은 오랫동안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을 지지했다. 그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지 성경의 문자적인 진리를 부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향은 다르다. 이들은 기독교의 필수적인 교리들에 해를 주지 않고도 창세기 1-3장과 현대 자연주의 이론을 조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타협하는 복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복음주의적 믿음을 고백한다. 그들은 복음주의의 가르침을 전파한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믿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들의 성경 접근 방식에 대하여 사람들이 의문을 품을 때 충격을 받고 놀란다.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종교적 진보주의자들과 무신론적 회의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조롱하고 위협한다. “당신은 우주의 나이가 10억년 보다 더 적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지요, 그렇죠?”

그 결과로 지난 20여 년 동안 수 많은 복음주의자가 완전히 비 복음적인 방식으로 창세기의 처음 부분을 해석하는 것을 놀라울 정도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더욱 더 많은 사람이 “오래된 지구 창조론”이라고 알려진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관점은 성경적 창조론의 원리들을 자연주의 이론과 진화론을 조합해서 서로 다른 세계관을 조화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들은 성경의 창조 기록을 정직하게 해석하기보다는 결국 적당한 얘기로 꾸며댄다.

그들 중 기독교 믿음을 고백하는 소수의 과학자가 이 수정주의를 이끌어왔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성경적 해석에 대한 어떤 기술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주의 이론의 최근 경향에 발 맞추어 특별히 고안된 창세기 1-3장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의 설명을 따르면 창세기 1장에 기록된 6일 창조는 긴 시간이며 창조의 시간적 순서는 변동할 수 있으며 창조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세부적 사항들은 시적 혹은 상징적인 비유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보다 더 잘 알아야만 하는 사람들, 즉 잘못된 가르침에 대항하여 항상 믿음을 방어하는 목사와 기독교 지도자들은 창세기의 첫 부분에 대해 싸움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껴왔다. 최근, 나의 설교를 들은 한 복음주의 목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고 그가 읽었던 표면적으로 복음주의 작가들에 저술된 여러 권의 책들로 인해 겁을 먹은 상태였다. 그 책들은 모두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그들은 과학적 혹은 학문적 자격증을 휘두르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관점이 성경 본문에 대하여 그들이 내린 자연주의적인 추정이 아니라 더 우수한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이라고 생각하도록 위협하고 있다. 이 목사는 내가 창세기의 첫 세장이 일련의 문학적 장치, 즉 수십억년의 진화를 통해 실제로 일어난 것의 “영적인” 의미를 주는 시적인 대하소설로 보는 것이 가능한지 물어왔다.

나는 주저함이 없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오,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나는 창세기 1-3장을 창조에 대하여 신적으로 계시가 된 역사로써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확신한다. 창세기 내용 중 어떤 것도 성경의 기록이 단지 상징적이고 시적이고 비유적이고 신화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창세기 말씀의 핵심은 “창조”가 오랜 시간에 걸친 자연적인 진화 과정을 통해 발생했다는 생각과 절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성경 본문의 충실한 해석이라면 허용할 수 있는 어떤 해석학 이론에 의해서든지 창세기의 처음 내용과 진화론 또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과학 이론을 조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게다가 자연주의의 결과로 나타난 철학적, 도덕적 혼란과 매우 유사하게 우리가 창조와 아담의 타락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거부하거나 타협할 때 모든 종류의 신학적 피해가 뒤따른다.

물론 나는 몇몇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들이 아담의 창조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받아들이고 아담이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아담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고 결정했지만, 창세기 1장 26-27절과 2장 7절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해석을 바꾸고 있다. 이 구절들 주변의 모든 말씀을 비유적 혹은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구절들을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들이 창세기를 해석하는 방식은 실제로 아담의 역사성을 약화하는 것이다. 창조 기록 그 자체를 신화나 비유로 이미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은 아담의 창조가 문자 그대로의 역사라고 (갑자기 그리고  임의로 보이는) 주장을 할 근거가 전혀 없게 된다. 역사적 아담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그들만의 해석과 모순이 될 뿐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오래된 지구를 주장하면서 복음주의자로 남아있다면 그것은 불가피한 모순이다. 아담이 온 인류의 문자적인 조상이 아니라면 죄가 어떻게 세상으로 들어왔는지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전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 받은 인류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위치가 타락한 인류의 머리 된 아담의 위치와 정확히 평행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2)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8-19)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5; 참조. 딤전 2:13-14; 유 14)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은 창세기 1-3장이 아담의 창조와 타락에 대하여 말하는 것의 문자적인 진리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 장들보다 성경에서 더 중심이 되는 말씀은 없다.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들이 창세기 1-3장에 대하여 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진보주의자들이 성경의 모든 말씀에 대하여 항상 해온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성경의 의미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성경을 비유적으로 영해하고 재해석한다. 그것은 위험한 성경 해석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은 자연주의자들이 가진 종교적인 전제들에 대한 매우 위험하고 불필요한 항복이다. 이러한 생각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심각하게 모욕하는 것이다.

창세기에 대해 오래된 지구 해석을 인정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권위에 대해 적대적인 해석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성경의 첫 장에 미리 짜여진 반()복음주의적인 가설들을 들이대고 있다. 이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언제나 믿음을 무너뜨리는 과정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이 관점을 받아들이는 교회와 대학들은 복음주의 진영에 오래 머물러있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토론 주제이다: 우리가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거부한다면 모든 종류의 신학적 피해가 뒤따를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며 창세기 1장과 2장을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성경의 다른 부분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토론해 보자. 우리가 기억할 것은 자연주의자들은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활동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추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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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vs 진화(24): 창조, 믿거나 거절하거나 창조 vs 진화(26): 창세기는 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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