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vs 진화( 8): 당신은 특별하지 않다

This entry is part 8 of 52 in the series 창조 vs. 진화

칼 세이건(Carl Sagan)은 아마도 지난 몇 십년간 대중에 가장 잘 알려진 과학계의 유명인사였을 것이다. 명성 있는 천문학자이며 방송인이었던 세이건은 공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연주의라는 ‘종교’의 최고 전도사가 되어 온전히 자연주의적 가정에 기초한 세계관을 선포하였다. 그가 가르친 모든 것의 기초에는 우주의 모든 것에 자연적 원인과 자연적 설명이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그 믿음(진정한 과학적 관찰이 아닌 믿음의 문제)이 그가 우주에 관해 주장한 모든 이론을 만들고 결정했던 것이다.

세이건의 종교에는 인간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믿음이 있다.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는 광대한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이 비인격체라면, 어떻게 인간이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세이건은 우리 인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1996년 12월(세이건의 사망이 3주도 남지 않은 때), <나이트라인(Nightline)>의 테드 코펠(Ted Koppel) 이 그를 인터뷰하였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있었던 세이건에게 코펠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세이건 박사님, 온 인류에게 남기기 원하시는 소중한 지혜 같은 것이 있으십니까?”

세이건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바위와 철로 된 덩어리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덩어리는 평범한 별 하나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죠. 그 별은 은하수를 구성하는 4000억 개의 별 중 하나입니다. 그 은하수는 또 다른 수십억 개의 은하 중 하나이고요. 그 은하들이 모여 하나의 우주가 됩니다. 아마 이런 우주가 셀 수 없이, 아마 무한히 많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과 우리 문화에 대해 꼭 생각해 봐야 할 관점입니다.” (ABC뉴스 나이트라인, 1996년 12월 4일)

그의 사후에 출간된 책에 세이건은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의 행성은 거대하게 둘러싼 우주 암흑 속에서 고립된 점이다. 우리의 미천함과 이 모든 광대함 속에서 우리를 스스로로부터 구원할 어떤 도움도 올 기색이 없다.” (Pale Blue Dot, New York: Random House, 1994, p. 9)

세이건은 이런 가혹한 결말에 대해 낙관주의의 모습을 유지하려 결연히 노력했지만, 그의 종교는 결국 모든 자연주의가 어쩔 수 없이 향하는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전적인 무의미와 절망이 바로 그곳이다. 그의 세계관에 따르면 인류는 아주 조그마한 변방의 거주지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광대한 은하의 바다 가운데 있는 희미한 푸른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우리는 나머지 우주로부터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다. 이 넓은 우주 속에서 하찮은 존재이며, 우주의 다른 존재와는 관계도 없고 어떤 책임질 일도 없는 것 같다. 어떤 도움도 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지만, 그러든 말든 그 일은 우주 속에서 그저 하찮은 일로 잊힐 것이다. 이것이 세이건이 말하는 ‘꼭 생각해 봐야 할 관점’이다.

이 모든 것은 자연주의의 영적인 어리석음을 강조한다. 자연주의라는 종교는 모든 도덕,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며 궁극적으로는 인류를 위한 모든 희망을 포기한다. 만약 비인격체인 우주만이 존재해왔던 모든 것이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 도덕성이란 것은 거론의 여지도 없는 것이 된다. 우리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물을 인격적 창조자가 없고 적자생존만이 온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라면, 인간의 양심을 규제하는 도덕적 원리는 궁극적으로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 된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에서는 해로운 것이 된다.

사실 자연주의의 출현은 현대 사회에 도덕적 재앙을 의미했다. 19, 20세기의 가장 해로운 사상 중 대부분은 다윈주의에 뿌리를 두었다. 다윈주의의 초기 옹호자 중 하나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는 1893년에 했던 강의에서 진화와 윤리는 서로 융화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저술했다. “도덕적으로 최고라 할 수 있는 (우리가 선 혹은 덕이라 부르는) 행동은 존재를 위한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과는 모든 면에서 충돌한다.” (“Evolution and Ethics,” The Romanes Lecture, 1893)

[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헉슬리는 ‘윤리란 인류가 높은 이성의 기능으로 낳은 긍정적 결과’라고 정당화하려 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우주의 과정’을 그저 따라가거나 혹은 그로부터 도망하지 말고 (도덕과 윤리의 어떤 외관을 유지함으로) 그것과 싸울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그는 순전히 자연주의적 원리에 기초해서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어떤 정당성도 제기하지 못했다. 사실 헉슬리나 그 시대의 다른 철학자들은 그런 수고로운(?)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더 선호하는지 외에는 어떤 도덕적 지침도 제시하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들의 철학은 전적인 주관적 도덕성, 궁극적으로 비도덕성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다윈의 생각에 동조하던 철학자들은 헉슬리의 요점이 무엇인지 금세 알아챘고, 20세기의 대부분을 특징지은 비도덕성과 대량학살을 위한 무대를 준비케 했던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 냈다.

예를 들면, 칼 막스(Karl Marx)는 경제, 사회 이론들을 고안하면서 의식적으로 다윈주의를 따랐다. 그는 그의 책 <자본론>을 다윈에게 헌정하며 “헌신적인 숭배자로부터”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또한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해 ‘우리의 관점에 대한 자연사적 기초가 담긴 책’이라고 말했다. (Stephen Jay Gould, Ever Since Darwin, New York: Norton, 1977, p. 26)

‘사회 다윈주의’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진화론과 적자생존의 원리를 인간 사회에 적용하였다. 그는 만약 자연계가 강한 것은 살아남고 약한 것은 멸망하게 모든 결정을 해왔다면, 인간 사회도 이런 규칙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종과 계층의 차이는 단지 자연의 방법을 반영할 뿐이다. 따라서 불이익을 당하는 계층의 고충을 안타까워할 초월적인 도덕적 이유는 없다. 이는 단지 자연 진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사회는 사실 지배층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그들의 세력을 더 키워줌으로써 발전되어 간다. 흑인은 문화나 더 높은 수준의 정신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믿었던 어네트스 헤켈(Ernst Haeckel)과 같은 작가들의 인종차별도 다윈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모든 철학도 진화론에 기초했다. 니체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 기독교의 도덕은 니체가 싫어했던 모든 것의 핵심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간의 약한 면을 미화했고 인류 발전에 해가 된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도덕 덕목, 즉 겸손, 자비, 겸양, 온유, 힘없는 자를 위한 긍휼, 타인을 위한 섬김 등을 비웃었다. 그런 이상향이 사회 안의 약함을 만들어 냈다고 믿었다. 니체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깨어 있는 자들, 소수의 권력층인 지배 계급과 쉽게 남에 휩쓸리는 양무리 같은 ‘대중’. 그는 이 지배 계급이 종교나 사회 관습에 방해받지 않고 초인(Übermenschen, 권력을 잡고 인류를 다음 진화 단계로 이끌어갈 자들)로 진화할 때에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니체의 철학이 독일에서 일어난 나치 운동의 기초가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니체가 철학계 대변인들에 의해 다시 명성을 얻고 있다는 것이고 그의 저서들이 다시 한번 학계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철학(혹은 그와 매우 유사한 어떤 것)은 자연주의가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할 곳이다.

이 모든 철학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경적 관점과는 정확히 반대로 향하는 생각에 기초해 있다. 이 모든 철학이 인간의 기원에 대한 다윈주의의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인간과 우주의 기원에 대한 반기독교적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이론들은 당연히 모든 면에 있어 성경의 원리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인다.

다윈주의의 모든 철학적 결과는 이 사회의 구조 자체에 부정적이며 파괴적으로 작용했다. 후기 다윈주의 철학이 이끈 20세기 혁명 중 어떤 것도 사회를 진보시키거나 고귀하게 만들지 못했다. 다윈주의 사상의 사회정치적인 주 유산은 한쪽 끝에는 막스에게 영감을 받은 공산주의가 있고 다른 끝에는 니체에게 영향을 받은 독재적 국가 사회주의(파시즘)가 있는 악의 스펙트럼이다. 또한, 현대 서구 사회를 볼썽사납게 만든 도덕적 재앙도 다윈주의와 창세기 첫 몇 장에 대한 거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역사의 이 시점에서, 비록 대부분의 현대 사회가 거의 완전히 진화와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믿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집단 기억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은 특별하다고 믿고 있다. 여전히 성경적 도덕관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랑이 최고의 덕목이라던가(고전 13:13), 개인의 주도권을 위해 싸우는 것보다는 서로 섬기는 것이 낫다던가(마 20:25-27), 교만과 반항보다는 겸손과 순종이 낫다는(벧전 5:5) 생각과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 사회가 이런 덕목을 얼마나 붙들고 있느냐와는 상관없이, 그 기초에는 어떤 철학적인 기초도 없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거절한 대신 자연주의적 물질주의를 받아들인 이상 현대인은 어떤 윤리 기준을 가지고 있던지 그 기초는 없다. ‘덕’을 ‘악’보다 높이 평가할 이유도 없다. 인간의 삶을 다른 어떤 형태의 생명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현재 사회는 이미 그 도덕적 기초를 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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