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5):예수님은 내가 죽어야만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This entry is part 5 of 7 in the series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이 번 칼럼을 시작으로 앞으로 몇 편의 칼럼을 통하여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님>에 대하여,
특별히 신자 안에서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어떤 일을 이루시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가장 많은 오해와 홀대를 받고 계신 분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오순절주의자(방언과 치유, 기적의 은사를 좇는 자들)나
은사주의자들은 성령께서 하셨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증거가 없는
예언, 방언 등을 성령께서 주셨다고 말하면서
성령님을 모독하고 그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밤낮 성령충만을 위해 부르짖는 사람들로부터
성령님이 주셨다고 말하기 어려운 예언과 방언을
성령이 주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성령님은 오해와 모독을 받으십니다.

그것이 지난 칼럼에서 지적했던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하신 성경을 이차적인 것으로 보고
신비로운 경험, 감정, 평안함, 느낌, 확신 등을 추구하는 것으로,
심지어 성령께서 기록하신 말씀의 참 뜻을 무시하면서까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는
무서운 죄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에 대한 커다란 오해이며
성령님을 심각하게 모독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성령님에 대하여 갖는 또 다른 오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칼럼에서 제기하였던 것처럼,
그들은 마치 내가 내 생각,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성령님께서
나 자신이 나의 계획과 생각을 내려놓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 15:5

그러나 반대로, 성령 하나님은
우리 없이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분이실까요?

우리의 생각, 지혜를 내려놓을 때까지는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시지 않는 분이실까요?
그렇게 하실 수 없는 분이실까요?

‘내가 죽어야만 예수께서 산다’고 하는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무언가를 하기 전까지는
성령님은 아무것도 못하시는 무능력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능력한 분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한 번 살펴봅시다.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출 11:10)

하나님은 바로가 회개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기를 기다리셨으나
바로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바로와 그의 나라에 재앙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가 완악한 마음을 갖도록 내버려두심으로
바로가 하나님 뜻을 거스르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능동적으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놔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바로의 완악함을 계획하셨으며 거기에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를 보내리라 (출 3:19-20)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 7:3-5)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이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의지적으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바로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할 수 있게
도와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내버려 두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 33:19)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해 좌지우지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 주권을 완벽하게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욥에게 일어난 모든 재앙은 사단이 한 것이지만
사단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 9:14-18)

신자의 구원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9-30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을 이렇게 부릅니다 (벧전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하나님은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때로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셨고
이제 당신이 그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도 그 사람이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이 받지 않으면 이 구원의 선물도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구원의 복된 소식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 영혼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영혼을 구원하시기로 하셨지만
당사자가 믿지 않아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 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나는 너를 구원하기를 정말로 원하는데?
너만 허락한다면 나는 네 안에 들어가서
너와 영원히 동행하고 싶은데
왜 허락하지 않니?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난 아무것도 못한단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런 분이 아니십니다.

구원 받기로 태초 전에 이미 예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마지막 날에 영화롭게 만드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10)

라고 우리는 찬송과 경배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능동적으로 내 삶 가운데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내 마음의 눈을 열게 하셔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자의 구원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절대로 간과할 수 없으며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 정하신 것이요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들 옆에서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 복음 서류에 그들이 사인하기를 기다리시다가
그들이 사인하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의 허락과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의지적이고 능동적으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실 자를 완악하게 하시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왜 어떤 사람에겐 긍휼을 베푸시고 어떤 사람은 완악하게 하십니까?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라고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롬 9:19-23)

인간으로서 갖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환경을 가졌던 욥,
자식들이 한 순간에 죽고 동시에 모든 재산을 잃고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었던 욥,
그는 자신이 겪는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은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런 고난을 주셨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욥기 38장부터 40장까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하여
질문을 하셨습니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40:2)

네가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 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40:10-14)

자신의 삶에 닥친 여러 가지 환경에 부당함을 호소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느냐?”고 되물으신 것입니다.

쉴새 없이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의 지혜로 닿을 수 없는
창조주와 전능자만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욥에게 물으셨고
욥은 결국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 42:2-3)

그 누구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문을 제기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말씀에 기록하신대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공의와 정의를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구원을 시작하시고 이루어 내실 뿐만 아니라
구원 이후에 성화과정과 영화롭게 변화되는 때까지
의지적이고 적극적으로 그 절대적 주권을 사용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 1:6)

신자가 거듭나는 것과 거룩하게 변화되어가는 성화의 과정은
이처럼 하나님의 강력하신 역사하심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참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그가 시작하신 그것을 그가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시게 하시고 복음을 이루신 뒤,
이제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그것에 순종하게 살라고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을 듣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때
그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일을 완성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며
그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이루는 영화로움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며 얼마나 힘이 되며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이 사실에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 1:3-5)

하나님은 “내가 죽어야만”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의 옛 자아를 죽일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죽어야만”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 옛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시기 위해
내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신자 안에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고 계실까요?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돕고 계시며 역사하시는지 깨달을 때에
우리는 더 힘있게 성화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약속된 성령에 대해서
다음 칼럼을 통해 이야기 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칼럼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강조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역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신자의 성화 가운데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 부분을 다루면서 말씀 드리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4): 잘못된 성화의 개념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6): 보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