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4): 잘못된 성화의 개념

This entry is part 4 of 7 in the series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지난 칼럼에서는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는 가르침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것은 성경적인 명제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입니다.
모든 신자는 마땅히 옛 자아를 죽여야 하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사실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날마다 주와 동행하고
조금씩 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하며, 우리에게 요구된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주어질 영화(glorification)로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는 설교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첫 번째 칼럼에서 제가 의문을 제기한 것처럼,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경적인 성화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옛 자아를 죽이라는 말 대신
내가 가진 지능, 재능, 힘, 뜻 등 하나님께서 주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까지
다 부정적으로 보고 그것들을 다 죽이라, 내려 놓으라, 없이 하라는 가르침의 문제입니다.

또한 성령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
분명히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격려하고 권면하기 보다는
신비롭고 성스러워 보이는 미신적인 성령의 음성, 환상, 감정의 변화, 평안함을 추구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성화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웨인 그루뎀도 그의 <조직신학>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성화의 이 소극적인 역할,
즉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마치 성화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냥 하나님이 하시게 두어라’는 유행어가
때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요약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화의 교리를 왜곡시킨 것이며
성화의 반만 강조한 것으로서
이 역할만 강조한다면 우리는 모두 게으른 신자가 될 수밖에 없고
바울이 롬 8:13에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라고 말한
성화에서의 적극적인 역할을 소홀히 하게 될 것이다.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중권, 407p>

그루뎀이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를 외치는 많은 사람들은
성화의 소극적인 역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성화의 적극적인 역할,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할 우리의 의무를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웨인 그루뎀은 이 두 가지 역할을 잘 이해하고 균형 있게 유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소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동시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좀 더 순종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역할도 또한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한 적극적인 면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소극적이고 게으른 신앙인이 될 것이다.
반면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소극적인 면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교만과 자기 확신에 빠질 것이다.

둘 중 어느 경우에 빠지든 우리의 성화는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순종하기 위한 부지런함을 유지해야 한다.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중권, 409p>

웨인 그루뎀이 정확하게 진단한 것처럼,
”내가 죽어야 한다”는 식의 성화론은 성화에 대한 단순한 오해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의 성화를 온전히 이루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 가르침을 따르면 우리의 성화는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의 정확한 뜻이 정립되지 않고

”옛 자아를 죽이는 것과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의
성경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주신 나의 재능, 지능, 힘, 뜻, 능력 등
나의 지체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치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적극적인 역할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는 것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가르침은
이제 그만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가르침은 단순히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의 소극적인 역할,
즉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할 뿐 아니라
잘못된 성령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들은 이러한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음성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마음에 이런 감정을 넣어주셨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성경 말씀을 보고 감동을 받으면 말씀의 본문과 전혀 관계 없이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생생한 계시를 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지로 떠나는 한 선교사가 창세기 12장 10절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아래로 내려가서 선교하라고 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창 12:10)

선교사는 이 말씀이 원래 의미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디로 내려가라, 올라가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이 성경 구절을 통하여
자신이 가고자 하는 선교지역 중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가라고
확실히 말씀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 선교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령님 당신의 영감으로 쓰신 성경의 참된 뜻을 무시하고
오늘날 상황에 따라 그 뜻을 변질시키는 분이 아니십니까?

분명히 당시에 이 구절을 기록하신 뜻과 진리가 분명히 정해져 있음에도
이 선교사를 위해 그 뜻과 진리를 무시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새롭게 조명하여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베드로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 벧전 1:24

세세토록 변하지 아니하는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것이며
변할 수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요 17:17

신자의 성화는 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도 말씀을 통하여 온전하게 될 것을 가르쳤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 딤후 3:16-17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
우리가 처한 환경에 따라 변질되고 재해석되며
다른 뜻으로 설명된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변치 않는 진리라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봅시다.
만약 성령님께서 원래 기록된 말씀의 뜻과 진리를
변질시키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조명해주시는 분이시라면
원래 성경의 의미가 아닌 것을 가지고
성령님이 혹은 하나님이 그렇게 분명히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아주 특별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하나님을 섬기는 법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계명이라 부릅니다.

그 중에서 세 번째 계명은 이와 같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7)

하나님께서 혹은 성령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가지고
분명히 그렇게 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 즉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짧게 표현하자면 “신성모독”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신비로운 체험을 강조하며 잘못된 하나님을 가리키는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 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 신 13:1-5

이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이적과 기사를 보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보다
그들이 체험하고 경험하고 꿈꾸고 감정적으로 느낀 것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을 제시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런 자들을 죽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멀리하고
오직! 여호와의 명령, 그 말씀을 지키고, 청종하며, 그분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동기나 자세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 성경을 가지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질시켜서 해석하고
하나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는 것,

나에게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실질적으로 계시하셨다고
말씀해주셨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모세가 경고한 이 꿈꾸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고
말씀의 진리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체험하고 경험한 “다른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기록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 요일 3:24

베뢰아 사람들의 신사적인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결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 하였다
– 행 17:11, 표준새번역

처음부터 들어왔고 영원히 변치 않을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지금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이 음성으로, 감정의 변화로, 환경으로, 평안함으로, 환상으로
주시고 있다고 생각하는 체험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립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경으로 돌아가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순종하며, 그 하나님을 청종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를 인도하고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 딤후 4:1-2

우리가 전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내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 내가 체험한 그분의 환상
내가 느꼈던 감정들, 특정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계시들
뭔가 더 신비롭고 성스럽고 영성이 깊어 보이는 듯한 말들
주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저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감정을 주셨습니다, 갑자기 일을 막으셨습니다…
어떤 일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런 불확실한 것들을
이제 강단에서 그만 가르쳐야 합니다.

모든 성도로 하여금
말씀이 아닌 다른 신비로운 체험을 좇게 하고
감정과 경험에서 오는 하나님에 대한 앎과 지식을 추구하게 하는
이런 무서운 죄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꿈꾸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선지자가 되십시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이처럼
잘못된 성령론에 근거하여 심각한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동하심으로 기록하신 성령님을
그 진리를 변질시키는 분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성화 가운데 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요?
성경은 성령님이 어떤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서
다음 칼럼에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3): 성경적 성화와 미신적 성화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5):예수님은 내가 죽어야만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