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 (5)

This entry is part 8 of 20 in the series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

의롭다함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로써, 하나님께서 믿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신학적으로 정의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면서 “이 사람을 완전히 의롭다고 인정한다.”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며 또 그 이상이다. 죄인을 그가 마땅히 받아야할 정죄함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을 받는 위치로 올려준다.

그런데 이것은 커다란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잠언17:15은 “악인을 의롭다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죄있는 사람을 의롭다고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3:7에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고 말씀하셨다.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데는 두가지 장애물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죄이다. 우리는 죄지을 때마다 죄책감을 쌓고, 진정한 공의는 모든 죄가 처벌받기를 요구한다. 악을 행하는 자가 벌받지 않는 것을 정의하자면 불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완전한 공의에 따라 모든 죄에 합당한 처벌을 실행하셔야만 한다. 우리는 이것을 직관적으로 안다. 악인의 죄악을 무시하는 것은 공의롭지 않다. 이 원칙은 사람의 양심 안에도 내재하고 있다.

공의로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죄로 인해 비틀어지고 부패했다. 그러나 아무도 악이 벌받지 않는 것을 괜찮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는 죄를 짓는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은 것 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악한 방법으로 죄를 짓는다. 우리는 벌받아야 마땅하고, 또 우리의 양심조차도 그렇게 생각한다. 두번째의 장애물은 우리가 구속받기에 우리의 공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죄지을 때마다 우리의 허물(또는 죄과)을 쌓을 뿐 만이 아니라 동시에 필요한 공로가 부족해진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의 경력이 완전하게 깨끗하게 씻어졌을지라도 우리에게 남은 것은 텅 빈 경력뿐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완전하게 순종함으로써 오는 완벽한 공로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완전한 의로움의 공로가 있어야 한다. 참으로 이것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성경적 관점으로 인간이 궁지에 빠진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교만하거나 자기 의로움에 사로 잡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성경말씀은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사64:6)”고 하고 또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고전3:19)”라고 한다. 우리가 가장 잘 행하고 생각하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이기적인 동기, 죄된 자존심, 자기 사랑, 자기 뜻을 이루려는 것과 악한 자기 의로움으로 얼룩지고 더러워져있다. 우리가 하는 것은 하나도 참으로 의로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죄로 물든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 이것이 모든 계명의 첫째이며 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기준에 절대로 다다를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공로를 쌓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더 힘썼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이다.

그러나 바울의 시대에, 만일 최선을 다하여 선을 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공로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최선을 다하여 선을 행하면 하나님은 자비롭게 대하여주실 것이고 더러운 옷과 같은 그들의 의로움이지만 만족하실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힘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하나님을 모욕하고 자신들의 죄만 더 크게 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의로움을 얻으려고 힘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의로움”의 정의이다.

앞에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두번 인용했는데, 산상수훈은 자기 의로움의 종교를 비난하는 설교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집어서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이방종교를 믿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경을 믿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까다롭게 율법을 지켰다. 사람의 기준으로는,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선행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부족할 뿐이라고 하셨다.

우리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의로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할 수 있다는 것을 평이하게 가르치고 계셨다. 그는 살인을 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미워하는 죄마저 버려야만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는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기준을 세우셨다. 그리고 만일 완전한 의로움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를 정죄한다. 야고보는 울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소망의 싹을 자취도 없이 잘라버렸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라고 말함으로써 허튼 소망을 갖지 못하게 했다.

그럼 우리의 결론은 무엇인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계속 반복해서 강조한다.

사도행전13:39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했다.” 로마서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갈라디아서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보다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자신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만하게 만들기 위하여, 선을 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것은 자신을 율법의 저주아래에 두는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 사람들의 문제였다.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하여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갈라디아서 1:6에 바울은 이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복음을 이렇게 왜곡시키는 사람은 누구나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엄숙하게 선언한다.

바울이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때에, 그는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했다. 자, 갈라디아서 4:21을 보자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율법을 잘 들었다면, 율법이 의롭다함을 얻기에 절대로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한다는 것을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실제로 율법에 순종하지 못한 자들을 정죄한다. 그러므로 죄인들에게는, 율법은 정죄함의 수단이지 절대로 의롭다함을 얻는 수단이 아니다. 죄인이 율법을 의롭다함을 얻는 수단으로 붙잡는다는 것은 오직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율법 아래 있고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비슷한 구절을 보자. 갈라디아서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여기 5:4의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 는 4:21의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 아래”있고자 하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는 수단으로 율법 아래에 있는 것과 같다 고 한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말한 것은 율법의 도덕적 가르침을 정죄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율법에 있는 의로운 행위의 기준을 면제시켜준 것이 아니다. 방탕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로마서 7:12에 율법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하는 것은 도덕률 폐기론( antinomianism)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을 퀘퀘묵은 구약적인 개념이라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것이 아니다. 분명히 율법의 도덕적 가르침에 불순종하는 것이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할 때, 그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를 인하여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확실히 이해하는가? “율법아래에 있지 않다”는 구절은 우리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더이상 율법의 정죄함 아래에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행위를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온전한 의로움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하는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이것들을 생각하라.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4:4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태어나셨다고 할 때, 이 말은 예수님이 유대인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많은 뜻을 담고 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율법 아래에 계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의롭다함을 얻는 수단으로 율법에 순종하셔야만 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지막 구절로 연결된다.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 (4)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 (6)

Phil Johnson은 Grace to You (www.gty.org)의 Managing Director로 일하고 있으며, 존 맥아더 목사의 많은 책들을 편집 하였고, Grace Church의 장로로서Fellowship Group인 Gracelife를 인도하는 목회자로 섬기고 있다. 부인 Darlene 사이에 3명의 자녀와 4명의 손자들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