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entry is part 1 of 1 in the series 사도 베드로

주님이 그에게 다른 이름을 주신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의 옛 이름을 고치어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이 아니다. 그는 “또한” 그를 베드로라 불렀다. 이 제자는 때로는 시몬 이라고 불리었고, 때로는 베드로라 불리었고, 또 때로는 시몬 베드로라 불리었다.

한국의 기독교 내부에서 지금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단연 정치라고 생각한다. 꼭 기독교인만 그런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매일 신문 기사에서 보여주는 엄청난 규모의 집회 사진에는 현 정부를 지지하는 무리와반대하는 무리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 둘 중 하나에 참여하거나 적어도 마음으로는 응원하는 기독교인들이 참 많이 있다. 특별히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에는 기독교단체의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이 함께 한다. 공산주의나 기독교 탄압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지역 교회 안에 있는 어른들 입에서 흘러나온다. 교회 안 젊은세대 중 어떤 이들은 조용히 현 정부를 지지한다. 어른들과 말싸움하기도 싫고, 또 과거에 그런 정치 관련 논쟁으로 좋지 않은 경험도 있기에 침묵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혹 어른들이 현 정부에 대한 우려를 꺼내놓으면 할말은 많지만, 그냥 듣고 있다.  한편 어른들은 현 정부의 명백한 문제를 보지 못하는 젊은 세대를 걱정한다. 전쟁과 가난을 경험하지 못했기때문에 저러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라의 안보와 안위를 걱정한다면 자기들과 뜻을 같이해야 한다고 종용한다. 젊은 세대는 국가 안보의 중요성 정도는 자신들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이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부분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른들의 일방통행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싫증 낸다. “교회 안에서 정치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말라”라고 경고할 정도로 정치 이야기는 민감하다. 정치는 그 성격상 한쪽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높다. 일단 편을 나누고 상대방이 내 쪽을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에 따라 상대방의의견을 듣는 자세 자체가 달라진다. 구체적인 논점을 두고 얘기하기보다는 “그럼 현 정부가 잘하고 있다는 말이야?”라는 식으로 전체를 싸잡아 평가하고 전체를 다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할 것인지 택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대화가 흘러가기 일쑤다. 정치인들이 서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뒤집어씌우는 프레임, “공산주의자”, “친미주의자”, “친일파”, “친중파”, “극좌파”, “극우파” 등을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며 대화가 마무리된다. “저 사람하고는 말이 전혀 안 통해”라는 불평과 함께 말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치 관련 정보를 얻는 경로가 정해져 있고, 각각 주로 듣는 경로를 맹신하는 데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도로 말하지 않고 ‘이게 팩트다’라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서로 정반대의 정보를가지고 결론이 나지 않을 싸움만 계속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고 둘 다 팩트라고 하는데 확인할 방법도 없고 그냥 말다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은 서로 다른 집회에 참여하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다가 함께 만나서는 “정치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는 원칙을 가지고 입을 닫고 조용히 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최선일까? 시국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커지면서 점점 더 그리스도인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고민이 깊어진다. 필자는 복잡하고 예민한 정치라는 문제에 관해 성경이 말하는 것을 찾아 예리하고 정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공감대를 가지고 함께 힘써야 하는 부분을 찾아보는 것이 현재 우리가 할 수있는 가장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칼럼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한마음 한뜻으로 힘쓸 수 있는 공감대를 찾아보기 원한다. 첫 번째 공감대: 모든 그리스도인은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논쟁을 싫어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주제에 관해 아예 말을 꺼내지 않거나 심지어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을 가장지혜로운 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어도 “모든 사람”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를 독려한다. 정치와 정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기도 제목에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꼭 포함되어야 할 대상이다. 물론 기도의 내용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각각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책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도의 목적은 같아야 한다. […]

누군가가 교회라는 공동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가장 먼저 생각하는 단어는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즐겨 사용하는 단어를 하나 꼽자면 그건 바로 “은혜”일 것이다. 은혜가 우리를 더욱 은혜롭게 하기 때문일까? 우리는 이 단어를 정말 사랑한다. 그 날 들은 설교가 풍성했거나 성도와의 교제가 좋았다면, 우리는 종종 “오늘 정말 은혜로웠어” 라고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은혜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이 “은혜”라는 단어는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그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를 아프게 할지도 모르겠다. 이 은혜가 맞닿는 곳에서 우리의 무능력함과 완악한 죄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주님의 은혜를 알면 알 수록 우리는 또한 희망을 갖게 된다. 그 희망을 성경을 통해 같이 살펴보자. 1. 주님은 은혜이시다.  주님은 여러 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런데, 그 하나 하나가 부분적이지 않고 완벽 하시다. 주님은 완전한 사랑이시고, 완전히 거룩하시며, 완전히 의로우시고, 완전히 은혜로우시다. 이 각각의 속성들은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뭔가부족해서 상호 보완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그 연결되어 있는 하나 하나의 속성들이 모두 완벽하다는 것이다. 이 완전한 속성들 중 은혜는 주의 백성을 향한 긍휼과 자비를 내포한다. 시편 기자가 말하길,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라고 이야기 한다 (시 116:3-5). 여러 환난과 슬픔 가운데서도 주의 백성이 넘어지지 않는 것은 주님의 형언할 수 없는 도우심 때문이라 저자는 고백한다. 주님의 온전하신 은혜를 통해 말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 듯,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께서도 온전한 은혜 그 자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 은혜가 주의 백성을 향한 그 분의 사랑을 더욱 명확히 한다. 2.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린다.  신약에서 쓰이는 “은혜”는 원어 “카리스-χάρις”에서 번역된 단어인데, 이는 “누군가가 다른 이에게 자원하여 무언가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이 단어를 좀 더 풀이하자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 을 지칭한다. 곧, 은혜는 받는 자가 전혀 자격이 없음에도 주는 자께서 그의 뜻 가운데 기꺼이 부여하신 놀라운 선물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논리에 따라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려는 습성이 있다. 물론, 열심히 일한 자에게 그에 맞는 대가를 주는 것이 당연하지만, 은혜는 그 합당한 보상을 뛰어넘는다. 이는 어떠한 열심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죄”이며,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력으로 이를 해결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롬3:9-28). 되려, 주님의 은혜는 역설적으로 일하지 않는 자, 즉 자격 없는 자에게만 은혜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롬4:4-5).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3-24). 모든 사람은 범죄자라고 성경은 말한다. 죄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는 어떠한 것으로도 회복시킬 수 없다. 인간의 공로(행위)로는 주님의 그 크신 영광에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절망 가운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발견된다. 어떠한 값으로도 대신 치를 수 없는 인간의 죄의 삯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끼어 우리를 대신하여 값을 지불 하신 그 속량, 그 십자가 은혜가 우리를 살리신 것이다. 즉, 은혜는 아들의 희생을 통해 가치 없는 우리 죄인에게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은혜는 곧 구원의 선물이다. 3. 예수님의 은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유효한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